에세이 한 편

힘들었다.

그래서, 다시 일기를 잡았다.

일기를 잡으니 다시 못된 본성이 발동했다. 컴퓨터로 쓰는 일기와 손으로 쓰는 일기 사이에서 갈팡질팡 갈팡질팡. 그래서 여러모로 찾다가, 문득 들른 한 블로그에서(사족이지만 네이버 블로그는 이런 말랑말랑한 블로그들이 많은 것 같다. 확실히 티스토리완 다른 분위기다) 이런 말을 봤다. 자기도 한 때는, 술을 먹고 강아지 한 마리라도 보는 날이면, 센티해진 기분으로 에세이 한 편이라도 써내던 때가 있었노라고. 그 말을 듣고 문득 다시 글을 쓰고 싶어졌다. 다른 큰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랬다. 그래서 나도 다시 블로그를 잡았다.

에세이, 라는 단어는 미묘한 느낌이 있는 단어다. 에세이를 대체할만한 단어로는 수필, 이라는 훌륭한 단어가 있다. 그런데 에세이와 수필이라는 두 단어의 어감 차이는 본문과 텍스트, 라는 두 단어가 보여주는 어감차이와 비슷한 느낌같다. 그냥 허세에 찌들어서일 수도 있고, 수필이나 본문과는 다르게 에세이나 텍스트라는 영단어는 단어를 해체해서 그 뜻을 살피게 되지 않으니(예컨대 본문은 本과 文을 합쳐.... 이런 사고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만, 아무래도 text는 그렇지가 않으니까)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분명한 어감차이가 있다. 왠지 수필은 기능적이고, 에세이는 뭐랄까 소설 속에서나 쓰일법한 단어같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비실용적이지만 그것만의 느낌이 있다...는 소리다.

내가 블로그를 하다가, 얼마전(아마도 올해)부터 블로그의 컨셉을 에세이에 가깝게 잡았던 것 같다. 일기와 겹치지 않으면서 블로그를 채울만한 글을 찾다보니 자연스럽게 에세이에 도달하게 된 것도 있었고, 사실 에세이라는 목적을 가진 글보다는 쓰고 나니 이름붙일만한 장르가 에세이 밖에 없었던 것도 있다. 

내 글은 재미가 없다. 그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애초에 내가 글을 쓰는 타입 자체가 아름다운 글, 재밌는 글이라기 보다는 기능적인 글에 가깝다. 그러니까 글 자체가 목적이 아닌 느낌?(근데 정작 쓰는 나에겐 글 자체가 목적인 경우가 대다수다) 그리고 여전히 내가 쓰고 싶은 글은 아름다운 글은 아니다. 기능적인 글. 조금 미묘한 표현이긴 하지만, 딱 그런 글이다. 반듯하고, 간결하고, 그래서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읽는 사람이 딱 이해할 수 있는. 아쉽지만, 내 글은 그런 글도 아니다. 내 글은 대체로 장황하고,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걸 질질 끄는 스타일이니까. 그리고 고쳐보고 싶지만 아직 고치려고 시도조차 못해봤다. 그러면 글을 쓰는게 재미없을 것 같기도 하고.

위에서 말한 블로그 외에 또 다른 블로그가 있다. 친구가 하는 연극학회 이름을 거꾸로 타고 올라가 네이버에서 검색하다가 어찌고 어찌고 어찌고.. 하는 과정을 거치다보니 꾸준하게 눈팅만 하고 있는, 그런 블로그. 이 블로그는 내가 쓰고 싶지만 염두가 나지 않는 글들로 그득하다. 그리고 사진도. 많은 사진, 말랑말랑한 글들, 그럼에도 속이 텅 비지 않은, 그런 글들. 덧글 하나 달지 않았지만 나는 어느새 애독자가 됐다. 왠지 부러운 그런 블로그. 나도 그런 에세이가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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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에세이라는 단어에 필이 꽂혀서 쓴 글. 생각해보면 정말 별거아닌, 어떤 블로그에서 문득 보고 지나간 한 줄에서 시작된 글이다. 가끔, 그런 한 줄들이 있다. 특별히 아름다운 글도 아니고, 특별히 강렬한 문장도 아닌데, 왠지 머릿속에 딱 들어차서는 비켜주지 않는 문장. 이번 문장도 그런 문장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스쳐 지나가 어떤 블로그였는지도 잘 기억은 안나지만, 그 블로그 주인에겐 고맙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기분이다. 덕분에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되찾을 수 있었으니까.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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