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의 힘

깨시민이란 표현이 있다. 소위 '깨어있는 시민'의 줄임말이라나 뭐라나. 이건 좀 비꼬는 투로 사용되는 단어인 것 같다. 처음 자기를 깨시민이라고 지칭했던 집단이 있는건지, 아니면 그런 집단을 향해 깨시민이라는 말을 누군가 던진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소위 깨시민 열풍이 한창 불었을 때, 그러니까 작년에, 나는 재수생이었다. 물론 재수가 끝나고 나는 투표를 했다. 필립스 쉬블리가 그의 개론서인 <정치학 개론>에서 밝혔듯이, 최적의 투표 수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는 투표를 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깨시민 집단의 주요한 공격도 이런 느낌으로 퍼부어진다.


깨시민이라는 말이 굉장히 논란이 많은 단어이고, 그래서 뭐 별로 다른 말이라고 생각되긴 어렵지만 돌려 말하는 의미에서 '깨어있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대신해서 사용하기로 하겠다. 내가 이 사람들을 보면서 느꼈던 건 두려움이었다. 자신이 깨어있다는 자각이 이런 광풍을 불러 올 수도 있겠구나. 그 사람들이 진짜로 깨어있는가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자신이 믿는 신념에 의한 힘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자신이 믿는 신념이 올곧다면, 아니 올곧다고 믿는다면 사람들은 종종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과감하고 용감해진다. 때로는 주변사람들이 볼 때 미쳤다, 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이러한 사람들은 사실 어느 집단에나 있다. '일베 vs 깨시민'이라는 대결구도를 만드는 사람들도 있던데, 사실 눈에 띄는 구도는 '일베 vs 오유' 정도다. 과연 오유에만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인가. 일베에도 있을 거고, 아마 이런 인터넷 집단이 아니라 어떤 믿음에 가까운 무언가를 중심으로 결속되는 집단에는 개인마다 그 믿음의 정도에 차이가 있는 법이고, 그 믿음의 정도에 따라 광신자도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종종 자살골을 넣는 효과를 내기도 한다. 왜, 엔하위키에서 종종 인용되던대로 말하자면 "빠가 까를 만들고 까가 빠를 만든다"고 하지 않던가. 


이 글을 갑자기 쓰게 된건 "우리나라 시민의식의 한계는 왕의 목을 벤적이 없다는 거다"에 가까운 제목과 내용으로 오유에 글이 하나 올라왔는데, 거기에서 솔직히 말하면 두려움까지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옆에서 계속 풀무질을 해주면, 언젠가 그 사람들은 정말로 큰 사고를 하나 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더 지니어스: 게임의 법칙> 2편이었나? 거기에서 홍진호의 모습을 보면서 느낀건데, 결국 홍진호는 그 편에서 승리자를 만들어내지 못했지만, 어쨌든 리더의 모습, 게임사의 모습이 보였다는거다. 그런 사람이, 전혀 극단적이지도 급진적이지도 않은 사람을 그렇게 바꾸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모습. 참고로 스타리그는 자주 보지 않았지만 홍감독님 팬임. 절대 디스하는게 아님.


그리고 저런 표현에서 매번 걸리는게 있는데, 이건 어쩌면 소위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의 필연적인 한계일지도 모르겠지만.. 너무 자기 자신을 높게 평가한다? 라는 느낌. 아니, 그러니까, 사실 내가 봐도 정치에 관심도 없고 그런 사람보다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투표권도 행사하고 그런 사람들이 더 훌륭한 시민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듯 한데,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의 계급이 뭐 하나 올라간다거나 그런게 아니라는 거. 종종 "우리나라 시민의식의 한계는~" 이런 표현이 잔뜩 들어간 글을 볼 때마다, 기본적으로 나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 쓴 글이라고 생각되지만서도 그 불쾌감은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저 글의 문제점은 2가지다. 왕의 목을 벤다, 라는 표현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섣불리 사용하는(그래놓고 사실 말하려고 했던건 ~다, 라고 한 발 내빼는) 태도와, 자기도 시민이면서 자기를 쏙 빼놓은 채 "우리나라 시민의식의 한계는~"이라면서 다른 시민들을 가르치겠다는 의지를 대놓고 드러낸다는 점.


왜, 옛날에 내 출신 고교를 엿먹이려고 했던 CBS 기자, 그리고 그 기자가 인터뷰했던 우리 학교 자퇴생이 인터뷰에서 썼던 표현- "사육장 속의 동물 같았다"라는 표현에 대해 내가 큰 우려를 표했던 적이 있지 않았나. 거기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든 그렇게 생각하지 않든 실제로 학교를 다니고 있던 학생들이 떠올린 첫 내용은, "그럼 우리가 사육장 속의 동물이라는 거야?"다. 그 내용의 옳고 그름과 무관하게 진보진영은 이런 방식으로 중립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 넣는 경우가 너무 잦다. 물론 이건 비단 진보만의 문제는 아니겠지. 예컨대 구원을 내세우는 종교가 "우린 구원자 ㅋ 너희를 구원해주지!" 하는 접근, 진보나 어쨌든 그런 사람들이 "우린 깨어있음 ㅋ 너희를 가르쳐주지!"하는 그 느낌이 모두 외부인들에게는 그 사람들 상상 이상으로 불쾌감을 줄 수 있는거다. 내가 볼 땐 영 좋지 않은 화법이다. 근데 다 쓰고 보니 이건 어째 이야기의 본 주제에서 좀 멀리 나간 이야기네.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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