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전(2011)


고3이라서 못보고 있었던 고지전을, 수능이 끝나고나서야 기회가 되서 볼 수 있었다. 수능 끝나면 책도 많이 읽고 영화도 많이 보고 게임도 많이 해야겠다-라고 생각했었지만, 역시나 그게 마음대로 되질 않아서..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시간이 흐르고 흐르다보니, 논술하는데 1주를 그대로 바쳤고, 벌서 수능이 끝난지 15일이 지나버렸다. 참, 시간 한 번 빠르다.. 우리 고3 시작할 때 부장선생님이 계산해주신 걸로는 대학 입학까지 110일. 그럼 15일 지났으니까 벌써 95일이다. 이럴수가! 하루에 1권씩 책을 읽어도 100권을 못읽는, 벌써 그런 날짜가 되어버린 것이다.

뭐, 잡담은 여기까지 해두고, 영화 고지전.. 사실, 전쟁영화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라서 관심을 가지고 봤던 영화였다. 그러면서도, 도대체 휴먼 영화라고 불리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싶기도 했다. 뭐 이 때까지만 해도 내가 이 영화 보면서 눈믈을 흘릴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던게지.

영화를 다본 소감이라면, 슬프다. 비판하는 사람들은 좋은 영화를 신파극으로 몰아갔다며 비판하기도 하지만, 아마도 영화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풀이하고 있는데서 기인하는 것일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이 영화가 사실적이냐 사실적이지 못하냐하는, 내 생각에는 썩 중요할 것 같지 않은 부분의 논쟁에서도 드러난다. 사실 나는 사실주의니 신파극이니 휴머니즘이니 하는 용어에 썩 익숙하지 않고, 그저 보면서 아, 슬프구나 하고 느끼는, 지극히 일반적인 감상자다. 다만 영화를 다른 관점에서 풀이하고 있다고 말한 것은, 고지전을 휴머니즘 영화로서 풀이하지 않고 전쟁 영화로서 바라볼 때 나오는 이야기일 것 같았기 때문.

사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아마도 너덜너덜하게 널브러지는 시체 이상으로, 미친듯이 쏟아지는 중공군 이상으로, 변모해가는 수혁의 모습일 것이다. 안경을 쓰고, 전형적인 '대학생'이었던 수혁은, 북한군 속에서 살아남아, 다시 국방군이 되어, 전쟁과 필사적으로 다툼을 벌이는 중위가 되어 있었다. 전쟁을 이기기 위해서라면, 동료의 죽음은 불가피하다고 받아들이는 것, 그는 그렇게 남성식 일병을 보냈다. ㅡ길고 어제의 남성식, 오늘의 남성식, 내일의 남성식을 항상 생각하지만, 그는 그들을 전쟁이 죽였다며, 애써 외면한다.

물론 나의 가치관과는 다르기 때문에(태어나서 실제로 내 근처에서 전쟁을 겪어본 적이 없는 세대이고 반전(反戰)을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세대이므로) 처음에는 수혁이라는 캐릭터를 굉장히 싫어했다. 그렇지만, 결국 되짚어보면 수혁이 그를 완전히 버린 것일까. 결국 이 영화는 모두가 피해자가 되는, 그런 끔찍한 영화지만, 수혁은 그런 피해자에서도 으뜸가는 피해자일 것이다. 그는 과거의 모습을 전방에서 잃었다. 그의 훌륭한 리더십은 악어 부대를 돌아가게하는 결정적인 부품이다. 그렇지만, 과격하게 말하자면 역시 그는 '부품'인 것이다. 그 역시도 결국 전쟁에 의해 죽어갈 내일의 남성식일 뿐.. 전방에서, 모두가 내일 죽지 않기 위해, 살아서 돌아갔으면 하는 별거아닌 소망을 품고 전방에서 생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수혁은, 따라서 피해자를 대변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가 하는 한 마디 한 마디의 대사들이 모두 '전쟁에 스스로를 잠식당해가는', 또는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들의 뜻을 대변한다.

한편 그런 수혁의 말을 듣는 제3자로서의 병사, 즉 은표는, 역시 같은 전쟁의 희생양이지만, 아직 전쟁에 잠식당하기 시작하지 않은, 비교적 '일반인'의 눈이다. 2초를 잡아야해, 라며 모두 남성식을 구하려고 하지 않는 순간에도 "너희들 미쳤어?"를 외치며 그를 살리기 위해 발버둥친다. 그에게 전쟁에 모든 것이 희생되는 것을 가리지 않는 다른 병사들은 이해 불능의 대상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결국 은표 역시 알게되는 것이다. 그들은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 그 발악을 하고 있는게 아니라,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치고 있는 거라고. 영화의 마지막에 가까워질 때까지 은표는 프래깅(상관 살해)을 저지른 수혁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과연 은표가 이것을 이해했는가는, 우리는 알 수 없다. 수혁이 차태경에게 죽기 때문에. 메시지를 사실상 이끌어나가던 수혁과 은표의 논쟁은, 수혁의 죽음으로 끝을 맞는다.

내가 눈물을 흘린 장면은, 휴전 협정이 발표되고 은표가 수혁의 시체를 등에 업고 돌아오는 장면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12시간의 반전은 생각지도 못한 채, 아, 이렇게 끝날 것을, 하루만 더 버텼으면 될 것을, 하는 아쉬움과, 그렇게 서로 논쟁을 벌이고 의견차를 보였던 수혁이 죽고 은표가 절규하던 장면이 겹쳐지면서.

그런데 12시간의 반전 때, 수혁이 있어야할 자리는 은표가 맡는다. 은표는 12시간의 전쟁에 나서서, 더이상 '제3자' 또는 '일반인'의 눈으로 전쟁을 바라보지 않는다. 전쟁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빨리 끝났으면 하는, 그러나 물러날 수도 없는 처지의 악어 중대에 그는 완전히 동화된다. 풀이하자면, 은표가 수혁을 받아들인 것일까. 사실 그의 '전형적인 군인적 면모'에 비추어 볼 때, 이것도 생각하기 어렵다. 그저 수혁의 빈자리를 채우고자 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신일영은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전형적인 캐릭터다. 과연 현실적으로 그 어린 나이에 대위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뒤로 미뤄두더라도, 그는 전쟁의 상처를 표상하는 인물이다. 물론 영화가 개봉한 이후 포항 철수작전 당시 우리는 저러지 않았다며 많은 항의가 들어왔다고는 하지만, 포항 때의 기억은 그를 어둡게 만든 가장 직접적인 요인이다. 그는 그 때 이후로 마음의 문을 닫았다. 고통을 두려워하는 것인지, 그저 기피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고통을 받아들이려고 하지도 않는다. 고통에 대해서는 무조건 모르핀을 통해 대응한다. 한마디로 모든 고통을 버린다.

일영에게는 포항 때 수혁의 말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기 자신이 살아야한다, 라는 것 이상으로, 대원들을 살려야한다는 생각이 강해보였다. 일영은 그것을 통해 움직이고, 그것을 통해 생각한다. 그런 그는 휴전협정 이후로, 아프면 울어버리라는 은표의 말을 들은 이후로, 웃는 모습 까지도 보인다. 감정의 회복, 이는 곧 그의 성장을 보이는 듯 했다. 그러나 전쟁은 그런 조금의 틈마저도 짓밟아버리고- 휴전협정의 '12시간 이후 발효' 조항은, 그런 일영을 정서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모두 죽여버린 셈이다.

차태경은 매력적이라고 말하기도 어쩌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뭐 그런 캐릭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시 차태경도 전쟁의 피해자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서사상 왜 넣었는지 이해가 안되는 캐릭터이기도 하고, 그저 여배우 한 명 등장시켰으면 좋겠는데, 하는 생각에서 등장한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차태경은, 결국 수혁의 죽음을 부각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그녀, 은표를 연결짓는다.

한편 차태경과 관련해서, 인상깊은 장면이 있는데, 은표가 태경에게 칼을 박아넣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다. 과연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 눈물은 누구를 향한 것이었을까. 본인? 수혁? 태경? 그것도 아니면 전쟁?

그러고보면 남한군(국방군)과 북한군(인민군)을 이어줬던 그 애록고지의 '상자'는, 이 영화의 슬픔을 더욱 배가시키는 요소이면서, 동시에 전쟁의 무의미성, 무차별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자기 나라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나라, 세상에 1억도 채 되지 않는 같은 민족을 향해 총을, 칼을 내세워야만 했던 그들, 그리고 그들을 그런 처지로 내몰았던 전쟁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고 무엇을 위한 것었을까. 휴전협정의 12시간 이후 발효라는, 어떻게봐도 영토 조금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여보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이 조항은 또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그러고보면, RTS같은 게임을 하면서, 우리는 전쟁에 대해 굉장히 무감각해진다. 그런 게임에서 모든 '유닛'은 그 모습과 인상착의가 동일하다. 거기다 무한히 쏟아져 나오고, 하나 하나가 죽는데도 아깝다라는 생각이 우선시된다. 이런 모습은, 사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면서, 우리는 반문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수혁은, 성식은, 일영은, 태경은 도대체 왜 죽어야만 했을까. 은표는 왜 그 많은 사람들을 잃어야만 했을까. 이러한 반문이야말로 이념의 장벽만 아니었다면,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되었을지도 모를 수혁과 태경의 등장이 반드시 흥행을 위한 요소라거나 서사 구조에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다.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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