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1. 꽤 오래전에 사놨던 책. 묵히고 묵힌 책이다.. 순천에서 사서 서울로 들고 올라갔던 책이다. 재수 시작할 때. 결국 군대갈 때까지 1년 반을 넘게 묵혀두다가 겨우 꺼내 읽었다. 나는 사실 단편 소설을 좋아하지만 그래도 어느쪽이냐하면 1권 분량의 장편소설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 단편소설집은 잘 고르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황정은 작가님은 (아직 장편은 한 권도 안나왔고) 경장편 한권과 단편소설집만 두 권 나와있으니 뭐 수가 있나 싶었다. 그래도 정말 재밌게 읽었다. 괜히 황정은이 아니었어.


2. 해설에도 나와있고 그동안 황정은, 이라는 작가를 설명하는데 많이 사용된 단어이기도 하지만 이 번에도 빼놓을 수 없는 소재가 <환상>이다. 그의 소설 곳곳에서 묻어나는 환상은 때로는 정신병적인 어지러움을, 때로는 참신함을 준다.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녀의 소설에 있는 이 세상은 정상이 아니야. 왜, 흔히 어려운 말로 부르는 '심상풍경'이라고 해야할까, 그런걸로 판단하자면 이해할 수 있지만 만약에 정말로 이렇게 세상을 보고 있는 사람이라면 정신분열, 정신착란 그런거 아닐까 싶은 아찔함. 그녀의 소설에는 그게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제대로 된 '판타지 소설'인 셈인데.. 그게, <백의 그림자>에서도 그랬던건데, 가슴이 아프다. 읽고 있으면 엄청 텁텁하다. 그냥 환상으로, 기발하고 때로는 지나치다 싶을 상상력만을 무기로 들고 나온 소설이 아니다. 그녀의 소설엔 무언가가 있는거다. 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같은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그렇다고 딱히 어떤 엄청난 메시지라고 부를만한 것도 아니라, 다 읽고 나면 뭔가 속을 답답하게 만드는 그런게 있단거다. 이번 소설도 하나같이 그랬다.


그게 소설가라는 직업일까. 예컨대 이 책에 수록된 <초코맨의  사회>를 보자. 초코맨에서 치즈맨으로 변신했다가 실패한, 결국 사회의 주류에서 계속 어긋나야만 했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 초코맨은 정말로 초코맨으로 설정된 것일 수도 있고, 그 초코맨과 치즈맨에 상징적 의미가 담겨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거기서 우리가 무언가 답답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걸 어떤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는건 어디까지나 작가의 역량이다. 내가 이런 딱딱한 글만 쓰는건 나한테 그런 역량이 없다는걸 알아서고. 나한테 저런 주제를 던져줬다면, 나는 결국 논리(또는 논리가 없어도 '있어보이게')로 싸울 수 밖에 없었을거다. 그게 나같은 아마추어 글쟁이와 황정은이라는 소설가의 차이겠지.


3. 나는 근본적으로 문학적 순수에 대해 회의를 가지고 있다. 문학은 문학 작품으로서 독립적으로 순수함을 유지해야하는가? 나는 그런 의견을 결코 지지하지 않는다. 소설가도 인간이고,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분명하게 표현할 권리가 있다..는 말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조금 도구적으로 접근하자면 소설은 어떤 글 보다 분명하게 그런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게 더럽고 치사한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문학적 순수가 완전히 짓밟혀서는 안되겠지만, 문학적 순수랍시고 문학을 독립되고 아주 고결한, 그런걸로 만들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다.


물론 작가로서도 무엇으로서도 그것은 도박이다. 어쨌든 그들이 쓰고 싶은 글이라면, 쓰도록 하는게 옳다. 둘 다 좋아하는 작가가 아니지만 그래서 이문열 작가든 공지영 작가든 그들이 어떤 정치적 이념을 표방하고 행동하는가에 대해서 크게 신경쓰지는 않는다. 그건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모습과는 별개의 문제다. 하물며 정치적 이야기가 아니라고 한다면 어떨까. 내가 처음 접했던 황정은 작가의 책은 <백의 그림자>였다. 거기에는 용산참사를 떠올릴만한 충분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걸 의도적으로 부각시킨 세력도 있는 것 같았다(다 읽은 입장에서, 사실 다 읽고나면 거기에 그렇게 자연스레 주목하게 되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거기에 있어서는 인간으로서의 옳고 그름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그런 소설은 반대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황정은의 소설은 결코 고결하지 않다. 환상으로 둘러싸인 소설인데도 우리 현실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그게 그녀의 소설이고 그래서 더 매력있다. 그게 그녀의 소설이니까. 누가 그녀에게 '고결하지 못하다'고 칼을 들이밀 자격이 있는가? 그건 비단 그녀 뿐만이 아니다. 누가 문인들에게서 정치를, 생각을 빼앗는가?


4. 다시 소설로 돌아가자면, 하나같이 버릴 이야기가 없는 그런 책이다. 하나 하나, 아, 이야기는 빼뒀더라도 좋았을걸, 하는 이야기가 없다. 하나같이 머리가 복잡해지는 소설인 것도 사실이지만.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이미지 맵

    서평/소설 다른 글

    이전 글

    다음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