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 <28>

  가끔, 그런 책이 있다. 뭐랄까, 딱 표지만 보고 삘이 꽂혔는데, 수중에 살 돈은 없고, 그렇다고 도서관이나 다른사람에게 빌려보자니 빌려볼 방도도 없고. 그래서 발만 동동동 구르다가 결국 까맣게 잊어버리고 마는(그러고보니 사람도- 인간관계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책들. 이 책도 그런 책이었다. <7년의 밤>은 내가 고3을 보낼 때 동아리 담당 선생님께서 읽고 계셨던 책이었다. 딱, 그것만 믿고 사서 봤던 책이다. 재밌었다. 그 때 생각했던 바, 특별히 깊은 메시지를 느끼지는 못했지만(굳이 느꼈다고 하면 궁지에 몰려가는 인간의 모습?) 정말 죽어라 읽었다. 서울에서 순천 내려오는 차 안에서. 정말 재밌게 봤던 기억이 난다. 유독 <7년의 밤> 서평에 영화같았다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딱 그랬다. 영화 시나리오를 읽는듯한 기분이라고나 할까? <28>이 나오고 책을 찾아볼 즈음에 봤던 기사에 가장 영화화되었으면 좋겠는 소설로 꼽히기도 했던데 충분히 이해가 간다. 재밌어서, 라는 이유 이상으로, 정말로 영화로 한 번 봐고 싶은, 그런 작품.


내가 책고르는 스타일이 스타일이니만큼, 이 책도 딱 그렇게 꽂혔다. 저자 이름하나 믿고. 그러다, 정작 사서 보지는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다 슬슬 잊어갈 무렵, 형이 정유정 작가의 책을 다 사들였다. 물론 나는 <내 심장을 쏴라>도 아직 보지 못한 작품이었지만 최근에 나와서 내가 계속 보고 싶어하던 <28>을 먼저 집어들었다. 책 두께는 <7년의 밤>과 비슷한 정도. <7년의 밤>만큼은 아니었지만, 이 책도 그렇게 미친 듯이 읽어나갔다.


*


<28>은 여러 사람의 시점을 끌어다 쓰는데, 다행히 시점이 바뀔 때마다 이름을 적어둬서 크게 헷갈리지는 않았다. 딱히 이러한 시점 변화를 통해서 어떤 사건의 전모를 다각적으로 접근하는 구성은 아니었다. 다만, 그 시점 중 하나가 '개'의 시점이었다는게 독특했다. 사실, 조금 냉정하게 말하면, 개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끌어다 썼다는 점을 제외하면 바이러스가 퍼진다는 설정 - 혹은 좀비 아포칼립스물과 그 내용이 크게 구분되지는 않는다. 물론 저렇게 지나치게 높은 치사율과 전염율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는 설정에 조금 의아했던 것 정도. 근데 어차피 이건 "치사율이 높으면 전염율이 낮아져서 오히려 불리"하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주워들은 것 뿐이고, 뭐 뭔가 작가님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겠죠. 뭐 단순실수여도 거슬릴 정도는 아니고.


기본적으로, 내가 생각했던 그런 작품은 아니었다고 본다. 굳이 묻는다면 <7년의 밤>같은 작품이 훨씬 내 취향이라고나 할까. 정유정, 이라는 작가가 이런 바이러스물에 뛰어들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으니까. 물론 일반적인 바이러스물보다는 훨씬 '정유정스러운'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도(물론 그녀의 작품을 2개 밖에 안읽어봤기 때문에 내가 이런 평가를 내리는 것은 어불성설이겠지만) 있겠다. 어쨌든 인간의 내면을 그려내는건 그녀다운 작품이다. 그런 의미에서 꽤 흥미롭기도 했고. 소설적인 재미가 없는 것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재밌게 읽었다.


결국, 등장했던 '메이저급' 비중을 가진 개들은 모두 죽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데- 사람이 아니라 개였다 뿐이지, 결국 본질적으로 개가 가지는 감정은 인간과 다를 것이 없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링고는 굉장히 인간적으로 그려진 캐릭터다. 어떤 의미에서, 이 작품에서 가장 인간적인 캐릭터다. 개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처음에는, 그저 조금 난폭한 그런 캐릭터에 불과했는데, 나중에 이르러서는 정감이 가는, 뭔가 안타까운, 그런 캐릭터가 되어있다. 이러한 감정은 인간을 살리기 위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지의 여부와 무관하게 개들을 모두 살'처분'하는 모습에서 극대화된다. 이게 과연 옳은 모습일까? 나 역시도 같은 상황에 처해져있다면, 그 개를 지키려는 재형과 죽이려는 군인들 중에 누구를 옹호했을지 알 수 없다는 점은 더더욱 씁쓸하다. 그리고 그걸 진행하는 군인이 결국은 도시를 버리게 된다는 사실도.


*


결국 인간의, 그리고 동물의 본질은 이기성일까. 가족을 잃은 슬픔에서 복수심을 불태우다가도, 다시 소방관으로서의 일을 시작하는 기준, 바이러스가 넘치는 세상에서, 과거의 일에 시달리면서 개를 포기하지 못하는 재형, 스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결국 복수심에 불타오르기까지 하는 링고. 사실 어떻게보면 이게 인간의(물론 링고는 개지만) 밑바닥에 있는 모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개들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올라 개를 죽이는 기준, 그리고 그런 기준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올라 기준을 향해 달려드는 링고, 그리고 그런 링고를 막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던지고, 결과적으로 속죄하기를 원하는 재형. 모두 제각기 이해가 가는 모습들의 인간이고 개이며, 그들의 사정 모두가 안타까웠고, 그래서 더더욱 이 소설의 찝찝한 결말(부정적인 평가가 아니라, 책을 딱 덮고 났을 때 처음 들었던 기분이 이거였다)은 한층 더 씁쓸했다.


*


이건 다른 이야긴데, 정말 오랜만에 읽은 소설이다. 학교 도서관에서 정치학 관련 책을 산더미같이 빌려놓고 이것부터 끝장을 보겠다며 소설을 미루고 미루고 있었기에. 지금도 이근욱 교수님의 <왈츠 이후>를 읽고 있고. 사실, 재미는 있다. 국제정치학이란거 참 재밌는 거구나, 싶기도 하고. 그렇지만 역시 소설만큼 잘 읽히지도 않고, 뭔가 읽고 있는데 갑갑한 느낌을 떨쳐내기 어렵다. 그런데 아직 읽으려고 빌려둔 정치학 책이 다섯권.. 아,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지옥의 대출을 했담. 함정은 그 책들이 모두 다 읽고 싶기는 하다는 거...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이미지 맵

    서평/소설 다른 글

    이전 글

    다음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