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국기 1.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 조은세상판

 

 

#0.

   십이국기 조은세상판. 아무래도 여러가지 안좋은 이야기도 많은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11권까지 묵묵히 잘 내줬으니. 책이 나온지 오래된 만큼 책의 전체적인 상태는 2000년대 초반 특유의 쌈마이 느낌 물씬. 전체적인 책의 재질감도 그닥 좋은 편은 아니고, 여러모로 번역도 어색한 문장이 많다. 전반적으로 일본어에는 능하지만 정작 국어에서 아쉬운 점이 많아서, 문장이 끊긴다는 느낌이나 한글로 써진 외국어 문장을 보는듯한 느낌이 많이 든다. 책 자체의 편집 이야기를 해보자면, 글씨 크기나 줄간격이 지나치게 크게 되어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엘릭시르판에서 한 권으로 끝난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가 굳이 2권으로 나온 이유는 아마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여러모로 아쉬운 판이었다.

 

   엘릭시르판이 나온 지금, 내가 굳이 조은세상판을 본건 우연히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읽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왠지 모르게 요즘 순천도서관은 시리즈물을 가운데만 들여놓는 경우가 많다. 1~5권까지 있는 책인데, 아마 다른 곳에서 앞권을 읽고 뒷권을 희망도서로 신청하면 그 뒷권만 사주는 모양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은데(예컨대 평범한 일본소설을 신청해도 어느땐 특정 취향이라고 퇴짜를 놓다가, 뜬금없이 판타지 소설을, 그것도 시리즈 중 37권만 들여놓는다거나) 어쨌든 그런 조금은 문제있는 희망도서 비치 때문에 나도 앞 권은 저 도서관, 뒷 권은 저 도서관에서 읽기도 했다. 이번에도 엘릭시르판 십이국기가 마성의 아이부터 총 네 권 중 2, 3권만 비치되어있어 어쩔까 하다가 그냥 조은세상판으로 1부만 때웠다.

 

#1.

   굉장히 독특한 판타지 소설이다. 일반적인 서구풍의 판타지는 아니고, 조금은 무협 분위기가 나는 중국풍 판타지물이라고 하는게 옳을 것 같다. 기린, 천제같은 소재들은 동양 특유의 느낌이라 신선하면서도 익숙하다. 기본적인 생활상은 일본에서, 정치적인 그림은 중국에서 따와 섞은 것 같은 세상이다. 저자는 탄탄한 설정으로 완전히 새로운 하나의 세계를 그려냈다. 그 세계에서는 사람과 동물이 태어나고 죽는 것마저도 다르다. 말 그대로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장르 중 하나이기도 한데, 이런 소설은 어떠한 역사적, 시대적 배경을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저자의 정치적 성향이나 사상이 강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대체역사소설이나 여타의 책들처럼 현실과 조율해야할 일도 없고, 논란이 되었을 때 피해나갈 길도 많다. 그것이 소설 속에서 새로이 만들어낸 가상의 사회, 가상의 정치다. 

 

   그렇다면 저자, 오노 휴우미는 어떤 세상을 꿈꿨는가. 의외라면 의외로, 적어도 1부까지는 저자의 정치적 색깔이 강하게 드러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십이국기 속의 세상은 그의 상상력과 고대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의 동양권 정치의 실제 모습을 적당히 버무려놓았다. 즉, 1부 속에서 저자는 기존의 정치를 판타지적 상상력으로 재해석, 재구성하는 수준에서 그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큰 원인은, 1부가 어디까지나 주인공인 경동왕 나카지마 요코의 개인사에 주목하다고 있다는 데에 있다.

 

#2.

   2권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경대국의 왕으로 새로이 낙점된 나카지마 요코가 봉래에서 넘어와 왕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찾아나가는 이야기다. 실제로 온갖 요마나 칼부림, 음모가 판치는 세상이기는 하지만 그런 데에 분량을 많이 할애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다른 서구권 판타지물처럼 화려한 전투씬 등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소지도 크다. 1부가 주목하는 것은 나카지마 요코가 봉래에서 넘어와서 겪는 신체적, 심리적 고난이며, 그 과정에서 변해가는 나카지마 요코의 모습이다. 전반부에서는 나카지마 요코의 "남을 믿을 수 없다. 그러나, 나에게 호의적인 사람이 없다고 해서 남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초점을 맞추면서, 어디에서나 철저하게 외부인으로서 소외되는 요코의 심리묘사에 주력한다.

 

   이 대목은 나카지마 요코의 성장기이기도 한데, 결국 그는 이 과정 속에서 봉래에서 일반적인 여고생에 불과했던 나카지마 요코에서 '경동왕 세키시'로서의 모습으로 성장해나가는 것이다. 당장 자신이 살아야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도와주는 라크슌마저 죽여야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던 나카지마 요코는 후반부에 이르면서 인간적인 성숙을 거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쪽 세상에 완전히 적응해나간다. 그런 그녀를 다시 만난 경국의 기린, 케이키의 "많이 변하셨군요."라는 말은 이러한 요코의 변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조금은 크게 보자면, 후반부의 주제는 선군이란 무엇인가, 천의와 선정 중 무엇을 택해야하는가, 나는 그에 합당한 인물인가에 관한 고민이다. 나카지마 요코는 연왕과의 대화과정 속에서 경왕이 아닌 평범한 사람(기존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금은 다르겠으나 소시민적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으로 남는 것과 경왕으로 오르는 것 중 무엇을 택해야하는가에 대한 답을 얻는다. 그것은 분명한 확답은 아닐지라도, 그녀에게는 하나의 척도가 될 수 있는 답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녀는 경동왕이 되었다. 이제 경국의 미래, 천의와 선정 중 무엇을 택할 것인가는 철저하게 그녀의 손에 달려있다.

 

   앞서서 저자가 자신의 정치적 이념이나 사상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고 했지만, 동시에 이것은 저자의 일종의 이상정치다. 자비를 베풀어 정치하는 기린과, 실제 정치를 이끌어가는 왕. 자비는 기린이, 이성적인 정치는 왕이 도맡는 이러한 체제는 굉장히 이상적이다. 민의를 대신하여 천의를 반영해 기린은 왕을 뽑는다. 왕의 옆에서 기린은 자비를 베풀 것을 거듭 간청한다. 마치 플라톤의 국가 속에서 보던 철인정치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의외로 이런 군주제는, 적어도 그 군주가 지극히 도덕적이고 지극히 자비로우며 지극히 이성적이라면 굉장히 이상적인 정치체계이기도 하다. 심지어 십이국기 속의 세상에서, 그러한 선군으로서의 자질이 유전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서, 왕은 죽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이상정치 속에서도, 각국의 모습은 제각기다. 파탄 직전에 몰린 경국은 왕의 존재의 필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지만, 이런 가운데에서도 황폐한 교국과 각왕(교국의 왕)의 모습을 보면서 이상적인 것이 항상 이상적으로만 흘러갈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안국은 평탄하게 500년의 선정을 맞는다. 환상의 밖으로 나오지 않고서도, 이미 이 소설 속에서 이미 이상은 이상일 뿐이다. 즉, 천의를 다해 뽑았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관건은 왕이다. 기린과 왕이 정치의 주요한 부분을 나누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만, 어디까지나 왕은 기린의 주인이다. 아무리 좋은 체계 속에서라도, 아니, 더더욱 그런 체계이기에 왕의 역할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각왕은 실패했고, 연왕은 성공했다. 경왕 세키시, 나카지마 요코는 어떠한 왕이 될까.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이미지 맵

    서평/소설 다른 글

    이전 글

    다음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