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베 미유키, 솔로몬의 위증3



1.

   길고도 길었던 대장정이다. 미야베 미유키의 솔로몬의 위증. 읽기 시작한지 몇 달만에 드디어 끝을 맺었다. 소설이 그렇게 루즈한건 아닌데, 일단 조금은 지나치게 길다는 느낌이 강하다. 덕분에 생각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읽었다. 그래도 1, 2권에 비해 3권은 정답을 늘어놓기 위해서인지 훨씬 흐름이 빠르다. 덕분에 3권만큼은 여타의 일반적인 단행본과 거의 비슷한 정도의 흐름으로 끝마쳤다. 그렇다. 일반적인 단행본이 아니다. 두께가 650여쪽에 이르는, 그것도 각권마다 비슷한 두께를 자랑하는 이야기의 대서사시다. 그리고 이 한 권은 그 대서사시의 마지막이기도 하다.


   사건과 추리를 거쳐 법정에 이른 조토3중 학생들. 중학교 3학년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성숙하다는 느낌도 없지않아 있지만(등장인물을 고등학생 쯤으로 설정하는 것도 괜찮지 않았을까) 읽다보면 그 아이들에게 푹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2.

   두께만큼이나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읽다보면 이게 누구고 저게 누군지 헷갈릴 정도다. 한가지 확실한건, 나와 비슷한 정도의 기억력을 가진 독자라면 다 읽고 책장을 덮은 순간부터 이미지와 직함만 어렴풋이 기억날 뿐, 이름을 선명하게 기억해내는 인물이 절반도 되지 않는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이야기가 조금 길어졌을 뿐이다. 인물들은 하나같이 매력이 있다. 끝까지 애정을 주지 못한 인물은 미야케 주리 뿐이었다. 미야케를 제외한 모두에게 조금이라도 애정을 나누어줄 수 있는 소설이었고 덕분에 읽는 내내 재판의 결과가 어떻게 될까 조마조마했다. 마치 실제의 재판을 보는 것 마냥.


   그러한 매력은 주요 인물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조연 쯤으로 설명할 수 있을 배심원단은 하나같이 개성과 매력이 넘치는 캐릭터들이다. 거의 지나가는 역할이라고 봐도 무방할 고바야시 아저씨 등도 마찬가지다. 18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분량 속에서 저자는 <솔로몬의 위증>이라는 완벽한 세상 하나를 만들어낸 것 같은 기분이다. <반지의 제왕>처럼 하나의 세계관을 확립하고 그 안에 새로운 설정, 새로운 종족, 새로운 언어를 불어넣어야만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지는게 아니다. <솔로몬의 위증> 속에서처럼, 정말로 살아 숨쉬는 것 같은 사람들이 살아숨쉬는 이야기를 하면, 그게 비록 새롭지도 신비롭지도 않은 종류의 것일지라도 어느새 우리 머릿속에는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진다. 이 소설이 바로 그렇다.


3.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처음에는 검사측인 후지노 료코를 응원했다. 처음이라고 한다면 3권의 초반부가 아니고, 2권에 이르기까지다. 3권에서부터는 왠지는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간바라 가즈히코를 응원했다. 즉, 변호인을 응원했다. 피고인인 오이데 슌지가 내가 딱 질색인 캐릭터인데도 불구하고 그랬다. 후지노 료코에게 변호인이 한 방 먹을 때는 마치 내가 한 방 먹은 것처럼 아팠다. 물론 반대로 한 방 먹여줄 때는 나까지도 속이 다 시원했다. 그렇게 즐겁게 읽는 동안에, 읽고 있는 나는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이야기는 클라이막스로 달리고, 점점 더 주체할 수 없을만큼 진지해진다.


   이야기는 오이데 슌지에게 잘못이 있느냐, 없느냐에서 가시와기 다쿠야와 간바라 가즈히코 중 누가 옳은가, 간바라 가즈히코는 잘못했는가로 옮겨간다. 어느새 오이데 슌지는 조연으로, 다쿠야와 가즈히코의 이야기를 하기 위한 장치로 전락한다(표현이 조금 그런가? 그럼 도구가 된다, 정도로). 다쿠야는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알 수 없는 입장이 된다. 물론 소설의 전반적인 핀트는 다쿠야는 가해자다, 라는 쪽이다. 마짐가에 이르면 지책감을 느끼는 가즈히코를 스스로의 늪에서 구출해내기 위해서 노다 겐이치, 미야케 주리, 그리고 모든 배심원단들의 협공이 이어진다. 그런데, 과연 이런 과정으로 간바라 가즈히코는 구원받을 수 있었을까. 아쉽게도 후일담은 노다 겐이치에게 국한되고, 나머지의 후일담은 한 글자도 들려주지 않는다. 


4.

   이 소설 속에서 가장 그 입장이 크게 변하는 인물, 평가가 극단적으로 변한 인물을 뽑으라고 한다면 미야케 주리와 가시와기 다쿠야다. 미야케 주리에 대해서는 앞서 말했듯이 끝날 때까지 조금의 애정도 주지 못했다. 소설 속에서 저자는 미야케의 마지막 거짓말을 간바라 가즈히코를 위한 것, 은혜를 갚는 것이라 묘사했고 간바라 가즈히코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표현했다. 그러나 솔직히 그 글을 읽고 있느 내 입장에서 본다면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다. 끝까지 거짓말하는 미야케 주리의 행동은 솔직히 말하건대 조금은 역겨울 정도였다. 내가 너무 냉혈한일지도, 그리고 내 이해능력이 떨어지는 것이거나 감수성이 바닥을 기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랬다. 그것을 간바라 가즈히코를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너무 작위적이지 않나싶을 정도로.


   그러나 원론으로 돌아가보자. 미야케 주리는 과연 왜 그렇게 됐는가. 미야케 주리를 그렇게 만든 것은 오이데 슌지와 학교의 전반적인 분위기이며, 거기에 미야케 주리 스스로가 무덤을 판 느낌이 강하다. 즉, 가시와기 다쿠야 살인사건의 범인은 오이데 슌지가 아닐지언정 오이데 슌지가 청렴결백한 것은 아니다. 미야케 주리가 왜 고발장을 썼는가. 미야케 주리는 왜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는가. 가즈히코의 말대로, 그것은 누가 되더라도 상관없는 이야기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 모든 조건을 충족시킨 것은 다름아닌 오이데 슌지라는 것이다.


   이렇게 미야케 주리가 스스로를 극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그 입장, 평가, 이미지를 계속 바꿨다면 그 반대방법으로 이미지를 계속 탈바꿈하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가시와기 다쿠야다. 가시와기 다쿠야는 소설이 전개되는 동안 이미 죽은 인물이다. 망자는 말이 없다. 그래서 가시와기 다쿠야는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드러내고자 해도 드러낼 수가 없다. 그러나 3권, <법정>편에서 생전의 가시와기 다쿠야의 모습이 한꺼풀 한꺼풀 벗겨진다. 소설 속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꼬마 철학자같고, 담담하고, 염세주의적이며, '스토익'하고(소설 속에서 스토익하다는 표현을 직접 쓴다. Stoic, 금욕주의를 뜻한다)... 이랬던 가시와기 다쿠야는 점점 더 자신의 한계를 드러낸다. 결국 그 결과물, 그 피해자가 간바라 가즈히코였다. 자신은 이렇게 힘든데, 자신은 이렇게 학교에 적응하지도 못하고 있는데, 왜 살인자의 자식인 너는 그렇게 행복하게, 담담하게 학교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느냐는 다쿠야의 반응은 '응석'에 가깝다. 그것도 끔찍할 정도로 잔인하고 철없는 응석.


   소설의 결론은 '자살'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가시와기 다쿠야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의, 그에 의한 자살". 이러한 표현은 어느 정도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배심원단의 간바라 가즈히코를 위한 배려가 깃들어있는 것이다. 이들은 어떻게 됐을까. 모두가 친구가 됐다는 마지막 노다 겐이치의 말은 뭔가 아쉽다. 뭔가 2% 부족한 것만 같다. 


5.

   사회파 추리소설의 어머니, 미야베 미유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녀의 소설은 추리 결과 자체에 주목하는 여타의 추리소설과는 궤를 달리한다. 사회파 추리소설을 표방하는 대부분이 그렇다. 일본작가로는 대표적으로 미야베 미유키나 히가시노 게이고가 그렇다. 작가들에게 결과나 트릭을 추리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요구하지 않으니까 추리하기 위한 단서를 주지도 않는다. 추리한 독자들이 납득할만한 결과물을 내어놓지도 않는다. 소설 속에서 묘사하지 않아서 알 수 없었던 요소들, 실물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비록 묘사하더라도 독자는 추리할 수 없는 종류의 것들이 끊임없이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 또한, 결과가 아닌 추리의 과정 속에 그 의미가 있다. 결과 그 자체가 아닌 결과 뒤에 숨겨진 의미에 그 숨겨진 뜻이 있다.


   학교라는 장소는 소설 속의 단골소재다. 장소로서의 학교도, 집단이나 조직으로서의 학교도 그렇다. 이 소설도 그런 학교의 폐쇄성, 학생들간의 미묘한 서열관계, 그 서열관계를 알고도 방치하는, 또는 방치할 수 밖에 없는 교직원들, 그리고 그런 서열관계와 내부성, 독립성이 외부 사회와 부딪히면서 일어나는 사태들에 주목한다. 미나토 가나에의 <고교 입시>가 개중에 입시라는 민감한 소재를 건드렸다면 이 소설 속에서는 앞서 말한 서열관계에 주목한다. 이 소설에서 진상이 드러나기 직전가지 소설의 중심에는 오이데 슌지와 패거리가 있고 그 패거리가 만들어낸 <조토3중학교>라는 조직과 그 서열관계가 있다. 굳이 이 소설 속에서, 가즈히코와 다쿠야, 겐이치의 가정 환경을 보면서, 미야케의 붕괴를 보면서, 현대 사회에서 학생들의 자아분열, 정체성의 혼란과 가정의 붕괴를 뽑아내고 싶지는 않다. 그것 또한 사실임에는 틀림없을 것이지만.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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