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시연, 흐리거나 비 아니면 호우 2권



  요즘은 인터넷의 서평만 믿고, 간단한 평가만 믿고 책을 사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 책, <흐리거나 비 아니면 호우>도 그랬다. 아마 처음은 <메멘토모리>였을 거다. 같은 노블엔진에서 나왔던 <메멘토모리>를 발견하고 보르자라는 작가를 찾아보다가 우연히 접한 작가가 바로 반시연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만남은 홍대 북새통에서. 레이블별로, 출판사별로 책이 정리된 북새통의 특성상 같은 노블엔진 책들을 다 볼 수 있는데... 뭐 딱히 다른건 아니었고 일단 인터넷에서 워낙 호평일색이었던 데다가 무엇보다 표지가 예뻤다. 그래서 덥석 골랐다가... 결국 그 때 페이트제로 박스세트를 사면서 내려놓고 왔었더란다.


  그러다가 드디어! 도서관을 통해서 만나게 됐다. '추론괴물 호우'가 어찌고 저찌고...하지만 그건 잘 모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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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은 1권을 안읽고 2권부터 읽었다. 도서관에 갔는데 1권이 없어서 그냥 2권만 빌려와서. 다 읽고난 소감을 말하자면 조금 찝찝하긴 하다. 1권을 안읽은 나는 모르는 이야기들이 수두룩하니까. 그래도 별로 신경 안쓰고 읽으면 또 읽을만한게 사실이다. 1권을 먼저 읽으면 물론 더 좋겠지만 그렇다고 2권을 먼저 읽어도 나쁘지는 않다..라는 느낌? 사실 옛날에는 이렇게 순서를 어기고 책을 읽는데 거부감이 컸다. 괜히 찝찝하고. 근데 엄마가 그렇게 순서에 크게 신경을 쓰시지 않는걸 보고 나도 이번에 한 번 2권을 뽑아들어본건데(물론 연속이 아니라 독립된 이야기긴 하지만!) 생각보다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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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은 부분적으로는 옴니버스 형태를 구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호우가 '헤브닝'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물론 그렇게 이야기할 건 아니지만... 어쨌든 주인공은 잡화점 '헤브닝'의 점원이자 '비이'와의 피고용인으로서(그리고 연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30대...라고 말했으면 좋겠지만, 사실 영 평범하지는 않은, 그런 사람이다. 원래는 '셔터'였다고 하는데, 1권을 읽지 않은 나로서는 도대체 여기서 말하는 셔터라는게 정확히 어떤 개념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야기를 크게 나누자면 2개인데, 하나는 구유시인과 관련된 이야기, 하나는 헤브닝에 관련된 이야기다. 그리고 책 전체를 궤뚫는 주제는, 호우의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나는 셔터인가, 아니면 헤브닝의 직원인가.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기에 적절한 인물인가. 그다지 새로울 건 없는 고민이고, 굳이 여기에 내 입장을 넣어볼 생각도 크게 들지는 않는다. 뭐, 이 세상에 태어나 정체성의 혼란 한 번 겪지 않는 사람이 어디있겠느냔 말이지. 그리고 실제로 정체서으이 혼란을 주제로 삼은 책들은 사람들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빈도만큼이나 많으니. 그다지 작가가 이걸 참신하게 생각해서 쓴 것도 아닐터다.


  작가의 글은 굉장히 흡인력이 좋다. 그래서인지 이 두꺼운 책을 나름 리듬감있게 잘 끌고 간다. 크게 보면 같은 레이블에서 나온 보르자와 비슷했다. 글 자체가 비슷하다기 보다는, 한국형 라이트노벨만의 그런 느낌이랄까. 전체적인 포맷은 일본의 그것을 따르지만, 아무래도 작가가 한국인이다보니 한국적인 표현도 많고, 번역체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다. 반대로 비교적 깔끔하게 다듬어져나오는 번역체와 달리, 조금 거친 느낌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런 느낌의 글이다. 꼭 잘 다듬어진 글이 좋은 글은 아니니까. 가끔은 군더더기도 있고 그런 글이 매력적일 때도 있는거다. 그리고 반시연의 글도 그렇다. 덕분에 이 책을 읽는 내내 즐겁게 읽었다. 큰 메시지를 찾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순수하게 재미를 위해 책을 읽는다는 본연의 목적에 충실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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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도 이런 소설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전반적인 설정에 있어서 캐릭터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그만큼 매력적인 캐릭터를 얼마나 잘 만들어내고 그 캐릭터를 얼마나 잘 끌고 가느냐의 다툼인 곳이 바로 이런 라이트노벨 계통의 장르소설이다. 아무래도 적은 분량에서(물론 이 책은 결코 적은 분량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충분한 흡인력을 얻으려면 그만큼 캐릭터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부분도 있을터다. 뭐 어쨌든, 이 책에서도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많다.


  아무래도 주인공은 비이와 호우가 당연히 메인일텐데.. 사실 호우라는 캐릭터는 조금 미묘한 느낌의 캐릭터다. 캐릭터가 매력적인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관점에서 미묘하다는 것은 아니고... 뭔가 굉장히 차갑고 무뚝뚝한 캐릭터인 것 같은데 사근사근할 때는 또 밑도끝도 없이 붙임성이 좋고. 비이한테 질질 끌려다니는 것 같다가도 꼭지돌면 답도 없고. 종잡을 수가 없는 캐릭터라고 해야되나? 뭔가 이렇게 표현하니 경박하기 그지없는 것 같기도 한데 그런건 아니다. 어쨌든 매력적인 주인공이고, 이 이야기에서는 아파하는 호우의 모습이 많이 나오니까 더더욱 이런 느낌은 아니지만, 뭐랄까 또렷한 이미지가 잘 안만들어지는 주인공이다. 


  그에 비해 여주인공...이라고 하기엔 비중이 너무 작고, 메인 히로인이라고 할 수 있는 비이는 굉장히 전형적인 캐릭터다. 뭐랄까 혼자서 판타지와 현실 사이쯤에 걸터있는 것 같은 캐릭터지만, 어쨌든 질투심많은 여자주인공 캐릭터를 온몸으로 체화시킨 듯한 캐릭터. 뭐랄까 호우의 이미지때문에 그런게 제대로 확 드러나지는 않지만 아마 일본 라이트노벨로 나왔다면 또 덕심 끓게 만드는 캐릭터 하나 탄생했을 것 같은 느낌. 물론 이 소설에서 비이도 매우 매력적이기 그지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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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고카피에서 아예 '추론괴물 호우'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이 소설에서 주인공 호우의 추론은 돋보인다. 그러나 역시 현실 속에서는 그다지 만나고 싶지 않은 부류가 아닐까. 딱 보면 그 너머에 있는 것까지 봐버린다니, 본인에게는 이러나 저러나 편리한 것이지만 아무래도 당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유쾌한 경험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글쟁이들도 비슷한 대우를 받지 않던가. 글을 쓰다보면, 호우처럼 추론의 영역에 있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글감이 될만한 것을 눈에 담고 머리에 쌓는 습관이 생긴다. 제대로 된 글쟁이가 아닌 나도 이 정도인데 본격적으로, 직업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은 더하겠지. 그리고 아무래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 좋아하는 사람, 자주 만나는 사람이 글에서 묻어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사실을 다루는 글들, 일상을 다루는 글이라면 당연한 일이고, 픽션을 다루더라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글은 한 사람의 표현이고, 몇 줄의 글 사이 사이에는 한 작가의 삶이 담겨있는 법이니까.


  그렇다보니 아무래도 주변에서 조금 불편하게 보는 시선도 있는 것 같다. 물론 나는 딱히 본격적인 글쓰기는 하지 않는데다가 주변에서 이렇게 작은 블로그나마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크게 그렇게 바라보지는 않지만, 작가들, 특히 인터넷에 글을 많이 쓰는 사람들이 그런 걸 자주 표현하곤 했다. 옛날에 읽었던, 작가도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한 에세이에서도 그런 내용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사실 이렇게 말하긴 뭐하지만 옛날에는 나도 글쓰는 사람이라는 아이덴티티가 분명하게 있었는데, 요즘은 그런게 별로 없다. 뭐랄까 글과 조금 멀어진 느낌이라고나 할까. 요즘에는 블로그에 글도 좀 더 열심히 쓰려고 하고 독서도 본격적으로 하려고 하지만, 둘 다 쉽지가 않다. 글로 돌아가자고 그렇게나 말했으면서도.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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