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 파씨의 입문



기어코, 쓴다.
그것도 11시 51분에,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내일은 금요일인데. 금요일이면 마땅히 학원을 나가야하는 날이 아니던가. 그래도, 쓴다. 오늘 다 못쓰면 내일로, 내일 다 못쓰면 모레로. 중증 의지박약인 나는 이렇게라도 시작하지 않으면 아마도 아야츠지 유키토의 <어나더>와 함께 이 책을 영원히 묻어버릴지도 모르겠다..라는 걱정이 들어서.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정은 작가님의 글을 읽고 나서, 그러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렇다, 나는 그만큼 황정은이라는 작가에 빠져있다.


백의 그림자로, 처음 만났다. 내가 고른 것도 아니었다. 학교 선생님이, 읽고 교지에 글 하나 써주지 않겠냐며 건네주셨던 책. 아무런 생각없이 잡았던 책이고,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읽었을 때(반 정도 읽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게 도대체 뭐야, 할 정도로 조금 난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와닿지 않는달까..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서정인 작가님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때(<후송>과 <미로>) 받았던 느낌과 조금 비슷했다. '메시지'라고 해야할까, 뭔가 하나 꼬투리잡아서 이런 내용이군요, 허허허, 하고 말할 수는 있겠는데, 더 나아가질 못하겠다고나 할까. 말 그대로, 이런 내용이군요, 라고는 말할 수 있는데, 이런 이야기군요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고나 할까.

그러다 (아마도 그 즈음에 중간이었던지 기말이었던지 뭔가 시험이 하나 있었고) 시험이 끝난 후에 다시 잡아서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지금이나 그 때나 가장 강렬하게 인상을 남긴 것은 따옴표가 철저하게 배제된 서술이었다. 이번 <파씨의 입문>에서도 그런 그녀의 서술은 그대로다. 단순히 따옴표가 없어졌을 뿐인데, 그 사실 하나만으로 '그녀'만의 느낌으로 소설집 전체를 사로잡는다.

전에 <백의 그림자>에 대한 서평에서 이런 서술에 대해 '울리는 것 같다'라고 조금은 막연하게 표현한 적이 있는데, 얼마전에 알라딘 펀치라인 인터뷰에서 더 좋은 말을 찾았다. 그 때의 기억을 되짚어 나대로 풀어써보자면, 화자는 독백하고 있을 뿐이고, 동시에 청자 역시도 그저 그 독백을 들어주고 다시 자기 자신의 독백을 내어놓는다, 라는 느낌. 담담하다, 라고 표현되어질 그녀의 소설의 느낌은 대부분 이런 사소한 곳에서 나온다. 

그녀의 글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비속어마저 담담하게, 일상으로 녹여낸다. 좆같다, 라던가, 에이 씨발, 이라던가, 그런 어떤 비속어도 상스럽지가 않다. 그건 그녀가 쓰는 작가 황정은으로서의 언어의  가장 큰 강점이고, 또 매력이다. 이런 그녀의 "화법"은 대화를 서술의 기본도구로 채용하지 않으려는 듯한 인상을 준다. 어쩔 수 없어, 말할 수 밖에, 라면서 말하는 것만 같다. 그런 최소한의 말마저도, 따옴표라는 경계로 독립성을 가지지 못하고, 말 그대로 독백적으로, 소리대신 가슴속에, 뇌리에 "울리는 듯한" 느낌으로 전달된다. 황정은 작가님이 의도하셨든, 그렇지 않았든간에.

황정은식 사랑.. 뭐라더라, 인터뷰에서 연애 풍경이라고 했던가, 어쨌든 그 쪽에 대해 논해볼까. 본인은 황정은식 연애 풍경이라기보다는 가장 보편적인 사랑, 일상의 공유라는 본질적인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녀의 소설에서는 좀처럼 사랑이라는 키워드가 치고 나오지 않는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사귀는 관계지, 하고 담담하게 말하듯이, 이미 하나의 배경인 것처럼 나타난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서술해내는 사랑이 전혀 감미롭지 않다거나, 전혀 와닿지 않는다거나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그녀의 표현 방식은 그녀의 소설에 나타나는 연애가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가 된다. <양산 펴기>는, <백의 그림자>와 마찬가지로 사회 문제를 소설의 표면으로 부상시키면서도 그 사회 문제에 끌려다니지 않는 미묘한 매력을 가진 단편 소설이다. 이 소설의 시작도, 장어구이를 사먹이자, 라는, 아주 '일상적인' 연애 풍경에 의해 시작되지 않던가.

물론 그녀의 특징 중 하나로 꼭 언급되곤 하는 '환상성'은 이번에도 빠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대니 드비토>에서는, 그녀의 글이 가진 환상성만이 표현해낼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랑'을 보여준다. 처음은 조금 장난스럽다, 라거나, 조금 웃기다, 라거나,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만 뒤에서는, 아, 이게 그렇게 가벼운 이야기만은 아니었구나, 하고 새삼스레 다시 느끼게 된다. 유라는 유도가 죽어 원령으로서 다시 만나길 소망하면서도, 유도는 죽고나서 아무것도 남김없이 사라지길 바라기도 한다. 그건 다시 말해(정확히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표현을 빌려 써보자면) 원령이 되지 않고 '좋은 곳으로 가길 바라는' 것이다. 

소설을 읽은 후 그녀와의 인터뷰도 꼭 읽어보길. 쓸쓸함의 역설이라던지, 이 세상에 대한 인식이라던지, 이 소설들을 가꾸어낸 작가, 황정은은 어떻게 가꾸어져왔으며 이 소설들은 또 어떻게 가꾸어낸 것인가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장담컨대, 그녀의 소설과 인터뷰를 모두 접하고 나면, 이미 여러분은 황정은의 세계, 나아가 황정은이라는 작가에게 푹 빠져있으리라.

P.S.)
개인적으로는 <디디의 우산>과 <대니 드비토>가 가장 좋았다. <야행>이나 <낙하하다>는 조금 난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고. 하지만 소설 전반에서 묻어나는 황정은 작가님 특유의 따뜻함과 담담함의 공존은 아무리 난해해도 책에서 손을 쉽사리 뗄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난해한건 나만의 문제일 수도 있고. 내 독해력의 문제인걸까.

너무 과묵하다. 그런데 일면,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엿보인다. 과묵함과 따뜻함, 고요함과 그 속에 가득한 `메시지` 속에서 허덕이다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을 덮는다. 뭐지 이게, 하면서도 놓을 수 없다.
──알라딘 100자평, 세르엘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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