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노 게이고 - <성녀의 구제>, 그녀의 구제는 누구를 향해 있었나


그녀의 구제는 누구를 향해 있었나
히가시노 게이고 - 성녀의 구제
#2012-06

   얼마전,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은의 잭> 서평을 남기면서 꽤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바 있습니다. 소설 자체는 읽으라고 권할만하다고 했지만, 역시 백은의 잭은 조금 미덥잖은 소설이라는 느낌이었달까. 히가시노 게이고는 '풀어 해칠 수 있는' 트릭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도 만들 수 있는' 트릭을 보여주는 작가인 만큼 추리소설 작가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죠. 그보다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굳이 추리소설이라는 형태를 빌려서 표현하고 있는 글 자체가 재미있죠. 은근히 재미난 트릭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대개 우연을 이용하거나, 가끔은 초과학적 요소(근미래 과학 등)를 가져다 쓰기까지 합니다. 재미난 트릭도 사실 생각해보면 어이없기 짝이 없는 것인 경우가 많죠.

   그런 그의 소설 중에서, 트릭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재미를 주는 작품이 <사명과 영혼의 경계>였고, 반대로 트릭을 포함해서 재밌었다, 라고 평가할만한 소설이 그 유명한 <용의자 X의 헌신>이라고 할 수 있겠죠. <사명과 영혼의 경계>는 이후 <플래티나 데이터> 등으로 이어지는 사회파 추리소설의 경향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역자가 후기에서 사회파 추리소설이라는 것을 정식으로 보여주기도 합니다.

   <성녀의 구제>는, 아무래도 <용의자 X의 헌신>과 쏙 빼닮은 이야기입니다. 소설 자체가 비슷한게 아니라 왠지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비슷하죠. 유가와 마나부가 나온다, 라는 시리즈적 공통점을 제외하더라도, 적어도 상식적인 트릭에 근거하고 있고(분명 허점은 많이 보입니다만) 그러한 트릭을 짜게 되는 근간에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있다는 점 말이죠. 용의자 X의 헌신과 성녀의 구제, 이 두소설은 모두 과연 이 세상에 이런 형태의 사랑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남깁니다. 그리고 그렇게 망연자실한 채로 있는 상태에서, 이야기는 끝을 내리죠. 처음부터 이 사람이 범인임, 하고 떡밥을 던져준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용의자 X의 헌신>을 다시 읽는듯한 묘한 기분이기도 했습니다.

   이 소설의 무엇보다 큰 매력은, 자신도 구사나기에 빙의된다는 것이죠. 읽으면서 누구나 범인이 아야네임을 알고 잇습니다. 소설의 전반에서 이미 모두 밝히고 시작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혹시 저 사람이 아닐까? 저사람이면 좋겠다, 아야네는 범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면서 책을 읽게 되는거죠.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도, 가해자를 사랑하고 피해자를 미워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잔인한 사람들이었지만, 가해자의 근간에는 무언가 따뜻한게 있었던 반면 피해자의 근간에는 자신의 계획만이 존재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좋은 근거를 대도 결국 어디까지나 악역은 살인자가 맡는다, 라고 하는 단순한 사실을 완전히 뒤집습니다. 그 정도는 <용의자 X의 헌신>보다 훨씬 심하죠. 막 끝냈을 때의 감상만 말하자면 살인을 한 아야네보다 그녀를 살인자로 만들어버린 요시다카가 밉다, 였을 정도니까요.



   히가시노 게이고, 라고 한다면,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잘 읽히는 작가인건 맞습니다. <백은의 잭>에 이르러서야 잘 읽히기만 하는 작가로 전락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작가의 기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읽었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중에서 평타도 못친 경우는 없었으니까요. <백은의 잭>의 경우에도 아슬아슬하지만 분명하게 평타를 때렸습니다. 반면 '수작'이나 '대작'이라고 부를만한 작품도 곧잘 없네요. <용의자 X의 헌신>이나 <성녀의 구제>는 분명히 그의 막대한 양의 작품 속에서도 확실한 수작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백은의 잭>이 그의 경향(잘 읽히고, 트릭 추측이 불가능하고, 어디까지나 따라오는 이야기가 메인이 되는)이 가장 바닥인 상태에서 드러난 작품이라고 한다면, 이 작품과 <용의자 X의 헌신>은 일종의 황금비를 철저하게 지킨 작품입니다. 그의 글이 가지는 특유의 가독성과 함께 어우러지다보니, 한 번 잡으면 놓을 수가 없는 마력을 띄게 됩니다. 지나치게 다작인데, 라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이름을 보면 우선 뽑아서 읽어도 되겠다라는 확신이 생기는 가장 큰 이유겠죠.



   사실 이 소설은 제목에서 모든 것을 말하고 시작했습니다. (적어도 저는) 소설의 내용과 연관시키가 어려워서 그렇죠. 그녀의 구제가 끝나는 순간, 그녀와 구사나기 모두가 참혹한 '비극'을 맞이합니다. 그녀의 구제는, 구사나기가 스스로 트릭에 빠져드는 것을 막는 것. 1년간 준비되어온 계획 살인, 이라기 보다도, 1년간 준비되어온 계획 살인방지, 그리고 그 계획을 포기한다는 방식의 살인인 것이죠. 그렇게 성녀가 되었던 그녀의 구제는 누구를 향하여 있었던 것일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구사나기가 죽는 것을 막는 '구제'였지만, 동시에 그녀가 구사나기와의 제대로 된 결혼 생활을 유잫기 위해, 구사나기의 '플랜'으로부터 자기만의 주도권을 가지기 위한 스스로에 대한 구제이기도 했던건 아닐까요. 뒷맛이 참 씁쓸한 소설입니다.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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