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로부치 겐 - <FATE/ZERO>, 절망으로 수렴하는 성배전쟁 프리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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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으로 수렴하는 성배전쟁 프리퀄
우로부치 겐 - 『FATE/ZERO』(全 4권 - 동인판[각주:1] 기준)
#2012-07 ~ #2012-10

   이야, 생각지도 못한 작품으로 올해의 10권째 '책'을 채울 수 있었군요. 아니, 우선 어디까지나 번역본을 읽은 수준이니 과연 '책'으로 세는 것이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영 좋지 못한 일(해적판 사건)도 있고해서 해외에는 판권을 안주는게 현재 방침이라고 하니 어쩔 수 있나요. 사실 골수 달빠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달빠 기질이 다분한지라, 와타야 리사와 함께 일본어를 배워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가 타입문인 것은 확실한데, 역시 시작을 못해서 항상 이렇게 헤매고 있지요. 뭐, 어쨌든, 꽤나 오랜 시간을 들여서 다 읽은 것 같습니다. 정신차리고 보니, 엇, 어느새 애니메이션도 방영하고 있었고. 결국 마음을 다잡고 1권부터 읽기 시작해서 겨우겨우 다 읽은게 오늘입니다. 우선 이 녀석은 라노베 계열로 분류한다면, 저로서도 몇 년만에 읽어본 라노베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품이겠지요. 원래 라노베는 거의 서평을 남겨두지 않아서(라기보다 한창 라노베 쪽을 읽을 때는 서평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언제 읽은 어떤 작품이 마지막이었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우선 고등학교 진학 이후 기억은 없으니 최소 3년, 제 추측으론 3년 반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으하하, 무슨 서론이 요따구로 길다니.

   저는 미리니름 당하고 보는 걸 별로 꺼리지 않아서 엔하위키같은데 돌면서 미리니름 틀 있더라도 그냥 무시하고 많이 봤는데 덕분에 중요한 장면은 이미 다 알고 봐서 조금 감흥이 덜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작품은 확실히 좋았다, 라고 해야겠네요. 우선 스토리 구상이라거나 하는 요소는 나스 기노코 본인과는 상대도 안될만큼의 실력이, 우로부치 겐의 손에 의해서 태어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나스 기노코의 경우 (물론 비쥬얼 노벨 자체가 분량이 더 적은 포맷일 수도 있지만) 스토리를 큼직 큼직한 이야기 한 두개로 엮어나가는데, 비슷한 정도의 기간(사실 F/SN보다 더 짧은 11일) 동안 나스 기노코가 풀어나간 이야기보다 우로부치 겐이 풀어나간 이야기가 훨씬 짜임새있었다는 느낌은 지우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스토리를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쓰기 용이한 것은 나스 기노코였는지 우로부치 겐이었는지는 알 수 없겠네요. 우로부치 겐같은 경우 이미 결말이 정해져있는게 어드밴티지이자 핸디캡이었을테고..



   우로부치 겐이 원래 어떤 사람이냐에 대해서는 솔직히 잘 모릅니다. 그의 악행(?)은 엔하 위키를 통해 심심찮게 봐왔지만.. 그 사람이 직접 손댔다고 하는 이 페이트 제로에서, 과연 그 사람의 성향이 그렇게 잔뜩 묻어날 요소가 얼마나 있겠느냐고 생각하기도 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생각은 굉장히 어리석기 짝이 없었어요. 배드엔드가 예정된 소설에서 그가 활약할 요소는 사방데에 널려있었던 건데 말이죠.

   소설 내에서 웨이버-라이더 조합 외에 나머지는 썩 이상적인 결과를 얻지 못합니다. 5차 성배전쟁이 애들 장난이란 소리가 괜히 나오는 것은 아니죠. 무엇보다 페이트 본편의 경우 제대로 끌고 나가기만 해도 해피엔딩, 하다못해 제대로 되먹은 엔딩을 볼 수 있는데 비하여 이 소설에서는 성배를 파괴하고 배드엔드를 맞이한다라는 예정된 결말을 대부분의 독자가 알고 시작하기 때문에 이미 꿈도 희망도 없는 소설로서 시작하는... 셈인데, 그래도 역시 소설인데 초지일관 그렇게 잔혹하게 굴리겠냐 싶지만 정말로 그렇게 잔혹하게 굴립니다. 보고 있노라면 할 말이 없을 정도. 특히 메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는 세이버는 구르고, 얻어맞고, 무시당하고, 령주로 강요당하는.. 4차 성배전쟁 전체가 그녀의 수난사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죠. 괴롭히기의 정점은 사실 랜슬롯을 등장시킨 시점입니다. 아, 그녀(라고 하는 것보다 역시 그.. 라는 호칭이 맞겠지만)의 역사 속 모습 중 최악의 상대아닌가요. 다른 사람도 아닌 랜슬롯이라니.

   그러고보면 사실상 이야기는 세이버, 보다도 키리츠구에게 초점이 모아지는 셈이고, 동시에 웨이버, 키레-아쳐 조합에게까지 넓어지죠. 시간은 계속 카운트되고, 그 시계가 정확히 0(제로)이 되는 순간은, 키리츠구가 시로를 막 구하게 되는 순간. 그러고보면 소설의 주인공은 또 시로인 것 같기도 하고.. 사실상 4차 성배전쟁 전체를 그리는 프리퀄이기 때문에 누구다, 라고 할 수는 없지만, 도대체가 이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 중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건 누구인지. 그나마 '행복' 비슷한 것에 가장 근접한 캐릭터는 웨이버겠고, 나머지는 모두 비극적이거나 그 자체로 '무'인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게 아니겠습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신체를 얻은 길가메쉬도, 나름 좋은 엔딩을 맞이한 셈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야기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초지일관 주인공들을 괴롭혀나갑니다. 그나마 해피엔딩, 이라고 말했던 웨이버 역시 계속해서 열등감을 맛보게 되고, 죽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으며, 랜서나 세이버같은 영령(서번트)들은 제대로 된 결말 조차 짓지 못합니다. 가장 큰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키리츠구는 결국 아무런 답도 구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이념과는 정반대의 결론만을 도출해버리죠. 과연, 이 소설은 애초에 좋은 결말을 상정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페이트 본편이 읽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 즐거움도 주고 재미도 주는(후지무라 타이가가 없으면 이 마저도 안될지도 모르지만..) 내용이었다고 한다면, 이 쪽은 철저하게 소설적으로 진행됩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반복해서 인용하는 거지만(이거 은근히 이곳 저곳 써먹을 곳이 많은 구절이군요), 나쁜 녀석이 착한 녀석이 되거나 불행한 사람이 행복해지거나 하는 최후의 마지막 한 줄[각주:2]을 전혀 주지 않는 셈이 됩니다. 아아, 페이트를 '편법'이라고 한다면(어디까지나 소설이 아니라 비쥬얼 노블이라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 이 쪽은 상당히 '정공법'적으로 돌파했네요.



   소설에서는 나스의 느낌이 썩 많이 나지 않습니다. 나스 기노코의 경우 설정 감수 정도였다고 하고, 우로부치 겐의 좀 더 제대로 되먹은 글쓰기(내용이 워낙 막되먹어서 할 말이 없지만..)와 잔혹한 상황이 어우러져서 은근히 소설을 읽는데 답답한 느낌을 줍니다. 짙은 안개 속에서 숨쉬기도 어려운 느낌이라고나 할까? 페이트, 라고하는 작품은 어디까지나 유쾌함이 따라가는 작품이겠습니다만 페이트 제로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유쾌함 제로. 키리츠구 쪽 - 그러니까 키리츠구, 세이버, 마이야, 아이리, 이리야 모두 너무 비극적인 운명 속에 던져진거 아닐까요. 아.. 참 묘합니다.



  P.S.)
   캐스터의 진명이 질 드 레인건 은근히 빨리 밝혀지죠. 이 질 드 레는 Gilles and Janne라는 작품이 있는 것에서 생각할 수 있듯이, 잔느와의 이야기가 있는 캐릭터입니다.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둘의 관계가 특별한 관계라는 이야기도 많았다고들 하죠. 아무래도 질 드 레가 헷갈릴 정도로 잔느와 세이버가 닮았다, 라는 설정을 지키는 방향으로 아포크리파의 세이버(女) - 진명 잔 다르크 - 를 디자인한 거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아서의 세이버보다는 이 쪽의 세이버가 더 좋네요. 성별이 안바뀌었다는 점도 마음에 들고.



  1. 신장판은 6권으로 발매 [본문으로]
  2. 니시오 이신, <모든 것의 래디컬> 작가 후기 中 -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 [본문으로]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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