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소설의 적절한 상보관계, 미나토 가나에 - <고백>


  우리나라에는 조금 텀을 두고 개봉하였지만, 일본 영화도 이럴 수 있구나, 라는 평가를 받았던 작품 중에 고백이라는 녀석이 있었습니다. 파란색과 회색의 색채톤으로 담아진 영상은 굉장히 차분했고, 담담했고, 무엇보다 잔인했었죠. 그 당시에는 어째서인지 모르게(아마도 지금보다 청소년 범죄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겠지만) 소년법에 굉장히 초점을 맞추어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오키, 슈야, 모리구치, 미즈키.. 영화에서는 혼자 캐릭터가 따로 논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던 모양이지만, 가장 좋아했던 캐릭터는, 그 어딘가 나사 하나 풀린, 그러나 반에서 유일하게 가장 정상에 가까웠던 미즈키였습니다. 소설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지만.. 소설을 읽다보니, 이 작품에서 초점을 맞추어야하는건, 소년법 이상의 무언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영화를 리뷰했을 때도 한 말인데, 고백이라는 작품은 무너진 일본 사회, 나아가 무너진 현대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냅니다. 영화는 크게 보면 모리구치, 미즈키, 나오키, 슈야, 그리고 나오키의 누나까지 해서 5명의 관점에서 서술됩니다. 물론 나오키의 누나 파트에서는 어머니의 일기장을 그대로 옮긴 부분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엄밀히는 어머니까지 6명의 관점이 적나라하게 묻어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나누어서 진행되는 이야기를 묶어보자면, 대충 4개 정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모리구치. 그녀는 가장 큰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됩니다. 영화에서는 그렇게 서술되지 않았지만, 자신의 복수를 방해한 남편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한 번 복수를 감행합니다. 사실 무엇보다도 영화와 소설이 적절한 상보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아마도 감독의 입장에서는 무언가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편집했겠지만, 영화에서 갑자기 눈을 뜬 사쿠라미야 선생에게 행동을 제지당합니다. 그러나, 그게 '연기'라고 하는 느낌으로, 협박(종업식 때의)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이것을 몰랐다, 라고 하는 설정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마지막에, 즉 복수 이후, 사쿠라미야 선생이 죽기 직전에, 내가 우유를 바꿔놓았다, 라고 고백하고 나서야 아, 내 복수가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이후에 베르테르를 이용한 복수까지의 연계가 부드럽게 이루어지려면, 사실 원작의 스토리를 따라야 했습니다. 이러한 스텝을 생략함으로써 영화에서는 뭔가 개연성은 2% 부족하지만, 모리구치라는 캐릭터를 더욱 나쁜 캐릭터, 정확히는 복수에 미친 싸이코패스형 캐릭터로 만들어놓았죠. 그게 목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썩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한 편 이야기의 중반은 미즈키와 나오키, 두 사람에게 던져진 부분입니다. 우선 나오키는, 전반적으로 영화와 다를 것 없지만, 영화에서는 제대로 담아낼 수 없었던 나오키 개인의 의식 부분을 치밀하게 잘 담아냈다는 느낌입니다. 무엇보다도 나오키의 누나라는 캐릭터를 얻어냄으로서 나오키 파트가 일본 사회의 잘못된 교육, 그릇된 이상에 대한 비판이라는 느낌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영화의 전반적인 서사를 이루기 위해 일기장은 남기고 나오키의 누나 파트를 지운 것 같달까. 그렇지만, 결코 넘길 수 없는 파트이기도 했는데 말이죠. 어머니가, 더이상 너는 착한 나오키가 아니다, 라면서 같이 죽자라고 뛰어드는 장면은, 허탈함을 금할 수 없게 합니다. 그게 과연 일본만의 모습일까요? 소설에서처럼 극단적으로 폭발하지 않을 뿐, 모든 아이들은 그런 부정적인 면을 가슴 속 깊은 데에 묶어두고 있을지 모릅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학생 시절에 듣는 말의 절반 이상이 입시니 공부니 하는 사회에서는 말이죠.

  제가 가장 좋아했던 미즈키는- 혼자를 하나의 파트로 삼아도 되고, 슈야와 묶어도 되는데, 이 둘의 이야기는 영화에서는 조금 더 감성적으로 그려졌고, 소설에서는 조금 더 개연성있게 그려졌습니다. 영화에서 미즈키와 슈야 사이의 관계에서 제가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베르테르를 추궁할 때, 아니 정확히는 추궁하는 진술을 하러 갈 때 가볍게 손바닥을 치고 지나가는 장면이었는데, 그런 장면은 소설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실 꽤 후반부까지 미즈키가 죽었다, 라는 이야기가 없길래, 혹시 소설에서는 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요.

  한편 슈야에 대한 느낌도 영화보다는 소설이 훨씬 개연성있게 그려냅니다. 무엇보다 슈야가 미즈키를 죽이는 장면에서, 영화에서는 단순히 루나시에 관한 것, 처럼 그려지는데, 마마보이라는 대사가 곧 슈야 본인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데 이용됩니다. 소설의 경우 영화보다 전반적으로 훨씬 짜임새있게 이루어져있다는 느낌이랄까. 영화를 보면서는 그런 생각을 못했지만, 결국 사춘기의 자의식 과잉의 폭발, 그리고 그런 자의식을 컨트롤해줄 수 있었던 어미니의 결핍, 어머니의 결핍에 따른 최소한의 도덕관 결여가, 슈야를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 사회에, 절대 다수가 어머니의 결핍을 겪지는 않지만, 과연 그 어머니들이 '자의식을 컨트롤해줄 수 있었던', '도덕관 결여'를 막을 수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요. 우리 사회는 어느새 도덕과 여러 가치 보다 입시와 공부를 놓아버린 것은 아닐런지요.



  결국 잔인한 복수 이야기일 뿐이지만, 과연 어떤가요. 우선 저는, 고백이라는 영화도 소설도, 읽고 우와, 대단하다, 라는 생각은 했지만, 역시 결코 개운할 순 없었네요. 대부분의 독자 분들이 그러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고백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에 대한, 어떤 고백인가요. 소설의 제목으로 붙일 때, 미나토 가나에 작가님은 어떤 의미에서 고백이라는 단어를 붙였던 것일까요.

  슈야를 제외한다면, 이 소설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고백, 고백, 고백합니다. 모리구치 선생님은 자신의 딸을 우리반 학생이 죽였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나오키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내가 죽였다, 살아있는걸 알고도 내가 죽인 것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미즈키는 자신이 루나시 신봉자라는 것을, 고백답지 않게, 그러나 확실하게 고백합니다. 사쿠라미야 선생님은 자신이 모리구치 선생님의 복수를 막았음을 고백합니다. 그 모두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백은, 어딘가 결핍되어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그저 고백할 뿐입니다. 고백하고나서 참회하지 않습니다. 고백하고 나서 그것을 통해 무언가를 이루어내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고백할 뿐입니다. 하다못해 모리구치 선생님까지도, 고백 그 자체는 복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고백은, 어쩌면 학우들 사이에 그들의 살인을 폭로하여 매장시켜버릴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소설 내에서도 그런 느낌으로 말합니다), 궁극적인 복수 역시, 고백합니다. 내가 혈액을 섞었습니다. 내가 폭탄을 네 어머니 연구실에 설치했습니다. 라고. 감정에 쉽게 흔들리는 나오키 마저도, 자신이 고백할 때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 무서울 정도의 담담함, 그런 담담함이 어쩌면 이 작품의 전반을 장악하고 있는 착 가라앉은 그 어두움을 형성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백, 이라는 제목. 일본 소설. 저만의 느낌일지 모르지만, 낭만적인, 그런 느낌을 연상하고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납니다. 영화 덕분에 소설이 이런 내용일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역시 다시 생각해볼 수 밖에 없군요. '고백'이 가지는, 그 의미에 대해서 말이죠.



  그렇다면 조리실 식칼은 어떤가요? 체육창고에 있는 줄넘기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어요. 애초에 우리 교사들은 학생들 교복 주머니에 나이프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도 그걸 압수할 수 없습니다. 가령 그 학생이 누군가를 상처 입히기 위해 가지고 있다 한들, 등하교 시간에 수상한 사람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한 용도라고 하면 그만입니다. 상부에 보고하면 ‘엄중히 주의하도록’이라는 소리나 듣는 게 고작입니다. 그 나이프로 사고 혹은 사건이 터져야 겨우 압수할 수 있어요. 당연히 그때는 너무 늦지요. 그리고 이번에는 ‘나이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째서 미연에 사건, 사고를 방지하지 못했나?’ 하고 문책을 받습니다. 정말 나쁜건 누구일까요?
  역시 엄중히 주의를 주지 못했던 교사가 나쁜 건가요?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했어야 했나요?
────유코 모리구치 
  대다수의 사람들은 남에게 칭찬받고 싶다는 소망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착한 일이나 훌륭한 행동을 하기란 힘듭니다. 그렇다면 가장 간단한 방법은 무엇일까. 나쁜 일을 한 사람을 질책하면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가장 먼저 규탄하는 사람, 규탄의 선두에 서는 사람에겐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겠지요. 아무도 찬동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규탄하는 누군가를 따르기란 무척 쉽습니다. 자기 이념은 필요 없고, ‘나도, 나도’ 하고 말만 하면 그만이니까요. 게다가 착한 일을 하면서 일상의 스트레스도 풀 수 있으니 최고의 쾌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한 번 그 쾌감을 맛보면 하나의 제재가 끝나도 새로운 쾌감을 얻고 싶어 다음번에 규탄할 상대를 찾지 않을까요? 처음에는 잔학한 악인을 규탄했지만, 점차 규탄받아야 할 사람을 억지로 만들어내려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면 이미 중세 유럽의 마녀 재판이나 다름없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벌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미즈키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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