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따뜻하고, 너무 어려웠던 -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대부분은 '우리 쪽에서' 아는 것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들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P. 81
물론 그 여자는 입양아였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에 늘 따라다니는 미아라는 이름 때문에 언젠가 한번은 자신의 뿌리를 찾아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마음먹다가 대학 시절에 연세대 외국어학당에 오게 됐고, 그렇게 해서 비슷하게 자신의 모국을 찾아온 김경석 씨와 만나게 됐다. 그 뒤의 일들은 다른 사람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서로 비슷한 사람들끼리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결국 미아는 한국을 저주하고 떠나게 됐다고 김경석 씨는 내게 말했다. 미아란 이름이 누가 지어준 이름이 아니라 그냥 미아, 잃어버린 아이라는 뜻이라는 걸 미아가 알게 됐거든요. 하지만 나는 사랑하는데 어떻게 해요. 죽도록 사랑하는데 어떻게 해요. 가지 말라고도 말했고, 스웨덴으로 따라 가겠다고도 말했어요. 그래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주고받았어요. 계속. 사실은 알고 보면 일본에 살고 있는 자이니치로서 저도 미아인 셈이에요. 미아를 이해할 수 있는 남자는 세상에 저밖에 없어요. 그런데 스웨덴으로 돌아가고 난 뒤로 미아가 점점 한국어를 잊어버리게 된 거죠. 편지는 점점 짧아지고 우리는 더이상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졌어요. 사람이 서서히 눈이 멀어가는 것, 그게 아니라면 사랑하는 사람이 서서히 죽어가는 것, 그런 느낌과 아주 비슷해요. 마짐가 편지에는 그냥 안녕리나는 말 뿐이었어요. 왜 돌고래를 좋아하느냐, 그래서일거에요.
────P. 193~194

"고통에 대해서 잘 아는 소설가라더니, 어째 안팔리는 소리만 하는구나.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내가 무슨 말을 해주면 되겠니? 궁금한게 뭐야?"
"말했잖아. 왜 바람이 부는지. 왜 손뼉 치면 소리가 나는지."
"난 네이버 지식검색이 아니거든."
"왜 네가 나한테 헤어지자고 말했는지. 그런건 지식검색에도 나오지 않아."
────P. 247
"알래스카 코르도바에 마리 스미스라는 에야크 인디언이 살아. 이 지구상에서 에야크어를 사용하는 마지막 인간이야. 사람들이 그 소감을 묻자,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대. '그게 왜 나인지, 그리고 왜 내가 그런 사람이 된 건지 나는 몰라요. 분명한건 마음이 아프다는거죠. 정말 마음이 아파요.' 듣는 사람이 없으면 말하는 사람도 없어. 세계는 침묵이야. 암흑이고."
────P. 249

가끔, 그 어떤 감상보다도, 몇 개의 인용구만으로 그 책에 대한 내용을 끝마치고 싶을 때가 있다. 김연수 씨의 단편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내게 바로 딱 그런 책이었다. 정확히는, 내가 무엇을 감상했는가에 대해서 논리적인 글로 풀어낼 자신이 없었다. 나는 <세계의 끝 여지친구>를 읽었다. 나에게 있어서 이 책의 의미는 그것이었다. 다른 책처럼, 이 책에 대해서 내가 무언가 풀어낼 여지란, 크게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작가가 모든 것을 다 드러내버려서도, 작품에 깊이가 없어서도 아니다. 내가 작품에 압도되었으므로.

서정인 작가의 <강>을 처음 읽었던 때가 기억이 난다. 그 책도 이 책처럼 단편 소설집이었고, 당시 동아리 활동 때문에 의무적으로 읽어야만 했던 책이었다. 굉장히 어려웠다. 솔직히 <미로>같은 작품은 딱 읽고 나서,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하는지(또는 뭘 표현하고자하는지) 도대체 감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이 책과 달리 여유를 가지고 읽지 못했던 터라, 그런 압박은 더욱 컸는데, 굉장히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내가 문학계의 사조라거나 그런건 잘 모르지만, 어쨌든 작가를 지칭하는데 <모더니즘>이나 <포스트 모더니즘>같은게 붙으면, 굉장히 어렵구나- 싶은 이미지를 서정인 작가가 먼저 그렸고, 거기에 김연수 작가가 제대로 덧칠을 했다.

김연수 작가의 책은 처음 접해보는 건데, 뭐랄까 감성적이라고 해야할까, 뭔가 감탄스러운 그런 성질의 것-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이었다. 뭔가 진지할 때는 진지한 대로, 진지하지 못할 땐 진지하지 못한대로. 위에서도 인용해놓았던 것 처럼, 247쪽에서, "난 네이버 지식검색이 아니거든."이라고 말하는 전 여자친구나, "그런건 지식검색에도 나오지 않아."라고 말하는 전 남자친구나, 그런 모습이 왠지 조금은 귀엽구나- 싶기도 하고. 도대체 그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주제가 뭐냐고? 글쎄, 과연 이 책의 주제는 무엇이었던걸까? 소통? 솔직히 다 읽고 나서도, 아, 이거 내가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데- 싶은 부분이 없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이 정도에서 나는 책장을 덮으려고, 이 알 수 없는 여운을 가지고 이 책을 덮으려고 한다. 어차피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쯤은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있지 않을까하는 작은 기대를 안고.


세계의 끝 여자친구 - 10점
김연수 지음/문학동네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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