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 백의 그림자

그림자라는 환상, 철거라는 현실
황정은 - 『백의 그림자』



모든 것이 색달랐다. 새하얀 표지, <백의 그림자>라는 제목, 황정은이라는 작가, 경장편이라는 장르까지도. <백의 그림자>는 나에게 있어서 조금은 신비로운 느낌을 풍기는 책이었다. 170페이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말 그대로 경장편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책. 경장편이라는 말은 실제로 통용되는 말은 아니겠지만, 그 오묘한 길이는 장편의 짜임새와 단편의 완결성을 어느 정도 잘 조화시킬 수 있는, 어쩌면 하나의 '황금비'일지도 모른다.

주인공인 '나', 즉 은교와 무재는 어찌 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삼십년이 넘은 전자상가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이다. 작가는 그러한 은교와 무재를 주인공으로 내놓으면서도 그들에 대한 정보를 극도로 한정한다. 그들의 외양에 대한 묘사나 과거 배경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의도적으로 피해간다. 은교와 무재, 그리고 그들뿐만 아니라 유곤과 여 씨 아저씨를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들은,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인물들이지만, 제한된 묘사의 베일 뒤에 모습을 숨긴다. 덕분에 그들은 하나같이 신비로운 이미지로 다가왔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현실이 있다. 은교와 무재의 직장인,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였던 전자 상가는 '슬럼'으로 취급되고 없어질 운명에 처해있다. 그런데 의외로 무재가 먼저 반대하고 나서는 건 철거 그 자체보다도 '슬럼'이라는 단어다.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해버리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히 정리해버리는 것이 아닐까."라고 말하며, 슬럼이라고 하는 단어에 담긴 폭력성과, 그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폭력성에 대해 경계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많은 말들─빈민이나 슬럼은 물론 남성이나 여성, 학생, 한국인이라는 말 까지도─그들의 개성이나 사정은 철저하게 무시한 채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버리는, '폭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도, 우리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그러한 말을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그 말에 어떠한 폭력적이거나 억압적인 성격이 담겨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러한 하나하나의 단어가, 우리를 자연스럽게 하나로 묶어내는 '폭력'을 가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아가, 그것은 전체주의와 개인주의라는, 20세기를 뒤흔들었던 화두와 연관이 되어있는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다시 '철거'라고 하는 주제로 돌아가서, 이러한 그들의 현실을 용산참사와 엮어낼 수 있을까. 이 책의 작품 해설을 맡아서 쓴 신형철 씨는, 작가의 성향으로 보건대 이야기를 지배하고 있는 말투에서 그렇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 이야기는 용산참사와는 너무나도 다른 성질의 것이다. 그것은 격렬함과 담담함, 저항과 주저의 미묘한 선상에 있는 문제다. 용산참사는 슬러머(슬럼에 사는 사람)들의 분노와 답답함이 폭발한 결과였다. 한없이 격렬했고 또한 한없이 잔인했다.

그에 비해 이 소설은, 그보다 훨씬 담담하다. 물론 드문드문, 전자상가가 사라지고 나면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걱정하는 모습을 엿볼 수는 있지만, 용산참사나 <난쏘공>이 다뤘던 것처럼 처절하거나 격렬한 느낌이 없다. 그들이 안타까워하는 것은,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단순히 생계유지라는 현실적인 우려 때문이 아니라, 그 상가에서 사람들과 맺어온 연결─그것이 전인격적인 만남이었든 계약적인 관계에서의 만남이었든간에─을 우려하는 것 같았다. 철거라는 문제에서마저도, 이 소설은 '난폭한' 현실적인 문제보다 조금 더 '따뜻한' 세계에 초점을 맞춘다.

한편 이 이야기의 핵심 중 하나는 '그림자'의 존재다. 이 그림자는 다른 요소들과 다르게 '환상'의 존재다. 그렇기 때문인지, 모든 등장인물들이 이 '비정상적인' 그림자를 너무나도 당연시 여기는데도, 정작 소설에는 비균질적으로 녹아들어있다. 그런데 이런 그림자에 모든 현실과 모든 등장인물이 이어진다. 이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또 하나의 소재인 셈이다. 그림자는 어떻게 풀이해야하는 것일까. 작품 속에서 그림자는 '일어선다.'고 표현되고, 그러한 그림자가 사람을 유혹하거나 '실체'를 대신하게 되는 것처럼 그려진다. 그리고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소위 '사회적 약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그림자를 따라가지 말라고. 그렇다면 여기서 이 그림자는 무엇일까?

그림자가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회적 약자의 현실에 대한 좌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림자를 따라간다고 하는 행위는 곧 그러한 좌절에 굴복하는 것이고, 그림자에게 자신을 빼앗기는 과정은 좌절로 삶의 의지를 잃어가는 모습이라고 풀이할 수 있는, 그러한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처음 만나는 작가이지만, 좌절을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그림자'라는 환상으로 돌려서 말한 모습은, 왠지 그녀답다고 말하고 싶다.

끝나기 직전, 이야기를 전반적으로 리드해오던 무재는 고삐를 놓고 은교에게 넘겨준다. 무재가 하자, 라고 말하면 그럴까요, 라면서 행동하던 은교가 반대의 상황에서 걸어갈까요, 하고 묻는 모습은 어떻게 풀이해야하는 걸까. 항상 수동자적 입장에 있었던 은교의 역할 전환은 그 이후로 이어지는, 그림자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는 것과 하나로 묶어서 봐야할 것이다. '그림자의 공포'를 극복했음은 사회적 약자로서 항상 노출될 수밖에 없었던 좌절로부터의 극복. 그것은 연민과 동정으로 일관하던 작가가 끝내 참지 못하고 내던져버린, 구체화되지 못한 희망의 메시지일는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어떤 장르라고 말해야할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연애소설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 소설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은교와 무재의 사랑이다. 은교와 무재의 사랑이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이야기를 끝맺는다. 그렇지만 이 소설은 사회 전반에 대한 작가의 따스함과 차가움이 뒤섞여있는, 사회소설이라는 생각도 버릴 수 없다. 언어의 폭력성이나 사회의 난폭함 같은 차가운 소재부터 따뜻한 사랑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모든 모습을 담아낸다. 그리고 작가는 그 모든 이야기를 단 한 번의 큰따옴표 없이 소화해냄으로써, 그들의 대화를 '소리'가 아닌 '울림'으로 만들었다. 그 조용한 울림은 그 어떤 말보다도 가슴에서 깊게 파고든다.

작가 황정은. 그녀는 철거라고 하는 비극적인 소재를 따스한 눈길로 그려냄으로써 그 '비극성'보다는 그 일을 겪는 사람들의 '인간적인 면모'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따스한 눈길은 엉뚱하게도 환상과 뒤섞여 그녀만의 느낌을 살려낸다. 정치적이고 현실참여적인 문학이 다시 범람하기 시작한 시대에, 그녀는 '환상'을 이용한 새로운 '현실참여'의 방법을 보여줬다. 그녀는 환상이라는 요소를 가지고 왔지만 그 것을 이용해 현실도피를 감행하지는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소설에 있어서 환상은 현실과 대비를 이루면서 그 현실을 더욱 강조한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비극적인 '철거'를 그녀는 희망으로 승화시킨다. 그리고 그녀가 던지는 희망의 메시지는 비단 약자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폭력적이 되어버린, 이 난폭한 세계에도, 아직은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고, 아직은 사랑해주고 싶은 것이 있고, '좋아할 수 있는 것들'이 있으므로, 아직 이 세상은 살아볼 가치가 있고, 이 세계가 그들에게 좀 더 호의를 베풀었으면, 하고 바랄 수 있는 세상이기에.


백의 그림자 - 10점
황정은 지음/민음사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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