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와 달동네

법적인 면에서의 확충이 이루어지는 동시에 이미 형성된 주거 빈곤층이 거주하는 주택과 주거 지역은 점진적 재개발 사업을 통한 주거 환경 및 주거 수준의 향상이 필요합니다.
──이룸 E&B, 「숨마쿰라우데 한국지리편」
교과서라고 했는데, 사실은 참고서다. 참고서와 달동네 하면 느낌이 안살잖아.

이 문장의 내용은 아마 재개발의 긍정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고 쓴 것일 터다. 저자들이 말하고 싶은 재개발의 개념은 결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처럼 돈이 없어 입주조차 못하는 아파트 따위를 지어놓고 가난한 이들을 내모는 것은 아닐터다. 그래서는 안된다. 그것은 주거 환경 및 주거 수준의 향상이 아니라 그들을 궁지로 몰아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도시 계획적인 측면에서, 도시 미관의 측면에서 달동네나 불량 주택 지구는 눈엣가시일지도 모르겠다. 초고층 빌딩이나 첨단화된 현대식 건물 일색으로 만들고싶은 지자체의 입장에는 동의하나 과연 그런 사소한 것을 위해서 주거 빈곤층을 궁지로 내몰아도 되는 것이냐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주택을 지어도 쉽사리 오르지 않는 주택보급률, 빈곤의 세습은 계속된다. 도움의 손길이 있더라도 그걸로 끝이다. 근본적으로 그들 스스로 자신의 생활 수준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는 그렇게 도와줘봤는데 결국 자립도 못하고 그게 그거더라, 가난한 이유가 있더라라는 말이나 하고 앉아있다. 그 얼마나 차가운 일이란 말인가.

앞서 몇 번 글에서 말한 것처럼 가난의 이유에는 기득권층이 큰 비중이든 작은 비중이든 들어있다. 그런데 그들은 점점 자신들의 '가진자로서의 도덕적 의무', 즉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외면하고 거꾸로 가난한 이들을 비판하면서 자신들을 합리화시킨다. 그러는 한 편 재개발이네 뭐네 하면서 가난한 이들을 몰아낸다. 30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 조세희 선생님의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철거나, 얼마전에 있었던, 허구가 아닌 100% 현실이었던 용산 참사나, 황정은 씨의 경장편 소설 <백의 그림자>에 나오는 철거나, 근본적으로 철거당하는 가난한 이들은 그 결과로 점점 더 궁지에 몰리게 된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어제 TV에서 해주는 방송을 봤다. 한성대학교 봉사단과 함께 달동네에 가서 거동도 못하는 노인 분들을 위해 도시락도 나르고 기름도 나르고 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아름다운 영상이었다. 한성대학교 봉사단 여러분의 모습도 아름다웠고, 그걸 보고 고마워하시면서, 어쩔줄 몰라하시면서, 겸연쩍게 미소짓는 할머니 할아버지 분들의 모습도 아름다웠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도 처절했다. 청년들도 오르기 어려운 계단과 언덕길로 도배된 동네와, 제대로 잠 잘 곳도 씻을 곳도 없는 불량 주택들과, 그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이 사회의 현실이 모두 녹아든 그 감정은 묘한 것이었다. 한가지 확실한 건, 나도 달동네 봉사를 해보고 싶었다는 것. 체격도 건장하지 않으면서 저런 노동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라고 누군가 따진다면 당연히 할 말은 없으나 그 모습 자체가 너무 아름다웠다.

이 사회는 묘하다. 그렇게 고생하고, 그렇게 웃으실 수 있고, 그렇게 선한 분들은 가난에 찌들어서, 생활고에 찌들어서 점점 나이들어가는데, 고생을 하던 어쩌던간에 악독하고, 돈에 집착하고, 누군가의 뒤통수를 치고, 교활하고 악랄한 이들은 점점 상류층에 편입되고 최상위 계층이 된다. 이 사회는 과연 합리적인 사회인가. 이 나라는 과연 합리적인 나라인가. 그러한 현실은, 합리적인 현실인가. 이 나라에는 자기가 맡은 일을 열심히하면 된다며, 권선징악을 가르치는 일선 학교가 있다. 그리고 그런 학교 주변을 둘러싼 가난에 대한 냉소와 불합리가 팽배한 사회가 있다. 없는 것이라면 그런 이들을 위해 진심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는 최상위 계층의 사람들이다. 이 사회가 씁쓸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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