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고발자(The Whistleblower)

 

 

내부고발자: 국제기구의 정의는 어디에서 성립될 수 있는가?

 

들어가며

   뜻하지 않게, <현대국제기구의 이해>라는 수업을 듣게 됐다. 수강신청을 한 이유는 여러가지였는데, 일단 국제기구에 대한 관심이 있기도 했고(물론 이렇게 심도있는 연구가 존재하는지는 몰랐다...), 타과생 친구가 첫시간 OT를 듣고 드랍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추억아닌 추억이 있는 과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양과목이 아닌 전공과목인 만큼 공부량은 상당했다. 덕분에 꽤 고생을 하면ㅌ서 중간고사를 치렀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교실에 들어가니, 교수님이 국제기구와 관련된 영화를 한 편 보자고 하셨다. 그렇게 보게 된 영화가 바로 이 영화, '내부고발자(The Whistleblower)'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줄거리는 간단하다. 미국에서 경찰로 복무하던 주인공, 캐서린이 디마크라 시큐리티(실제로는 다인Dyn Corp International)를 통해 보스니아 내전의 평화유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파견되고, 거기에서 인신매매와 강간이 성행하는 모습을 고발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앞서말했듯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데, 영화라는 각색의 틀을 고려했을 때 이것보다 훨씬 더 잔인했을 현실을 생각해보면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다.

 

국제기구는 정의로운가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국제기구가 항상 정의로운 것은 일종의 환상"이라고. 그럴만하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자행되고 있는 것이 국제기구라면, 국제기구의 정의란 어디에서 성립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국제기구의 태생적 한계가 관련되어있다. 국제기구는 독립적인 기구이자 국제행위자로서 존재하지만, 그 자금이나 임무수행의 과정에서 주권국가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특히 UN과 같은 정부간기구(IGO)라면 그 정도는 더더욱 심해진다. 나아가 이러한 국제기구와 그 산하기구도 결국 관료제적 시스템을 갖춘 하나의 조직이라는 문제도 있다. 이러한 두 문제점, 한계가 만나면, 국제기구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게 된다. 그런 국제기구의 독립적인 존재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 정당성, 정의로움, 국제사회에서의 필요성을 인정받아야한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에서, 국제기구는 대원들에게 면책권을 부여하며, 여러 사안에 대해서 모르쇠로 일관함으로써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지 않고자 노력한다.

 

   국제기구 자체가 사악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국제기구는 스스로의 조직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아마도 스스로는 '더 크고 중요한 일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자신들이 사소하다고 판단한 범죄를 묵인하고 있는 셈이다. 그 과정에서 범죄의 정도는 점점 더 커져서 결국 인신매매에 이르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의로운 행위를 하고 있다는 믿음 하에, 또는 그러한 믿음조차도 없이, 국제사회의 행위자로서 평화유지의 임무를 떠안게 되며, 전지구에서 가장 궁지에 몰린 이들과 대면하게 된다. 전자라면 보상심리가, 후자라면 말할 것도 없는 본능에 자신의 몸을 떠맡긴다. 그런 곳이 국제사회다. 현재로서는 이들을 처발할 그 어떠한 방법도 없는 것이 현실이며, 이것이 국제기구의 태생적이며 가장 큰 한계다. 즉, 국제기구의 성립 자체는 정의로우며 절대적인 가치를 위한 것이지만, 그것이 구성원들의 가치관과 일치한다는 보장은 없는 셈이다.

 

내부고발자의 삶

   많은 내부고발자들이 그러하듯이, 내부고발자는 배신자로 몰려서 해고되고, 다시는 그 분야에 발을 들이지 못하지만, 정작 고발된 당사자들이나 그들을 고용했던 이들은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으며, 대개 다시 임무에 투입되었다. 이 일을 묵인했던  Dyn Corp.은 여전히 UN과 함께 일하고 있다. 당시 고발된 평화유지군 대원들은 본국으로 송환되었으나 별다른 처벌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캐서린은 자신의 자리에서 해임당해야했으며, 다시는 국제 커뮤니티에 발을 담그지 못했다. 심지어 미국인이었던 그는 네덜란드로 자신의 삶의 터전을 옮겼을 정도였다.

 

   내부고발자들은 정의롭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그러한 이들을 자연스럽게 배신자로 몰아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주변에서는 그러한 일이 없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의외로 소소한 내부고발은 빈번하게 이루어지며,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대해 우리가 취하는 자세는 대부분 "쟤 왜저래?"하는, 보수적인 자세다. 그들의 내부고발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융통성없고, 조직에 융화되지 못했으며, 일종의 배신자로 몰아간다. 외부에서 도움이 온다면, 그래도 내부고발자는 무사히 살아갈 수 있다. 또는 익명을 철저하게 지켜냈거나.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내부고발자의 삶은 철저하게 파괴당한다. 우리의 주변에 이런 내부고발이 전혀 없다고? 학내 OT에서 이루어졌던 행위를 고발한 후배를 선배들이 직접 이름까지 걸고 나서서 "과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로 몰아갔던, 페이스북에서 이루어졌던 어이없던 사건. 그건 일종의 내부고발이었고, 이미 졸업한 선배들에 의한 "낙인찍기"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이 이루어지는 메커니즘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그들에게는 악의가 없다. 적어도 그들 스스로는 악의를 느끼지 않으며, 자신의 행위를 악의라고 간주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저 자신이 속한, 또는 속했던 조직에 대한 만족감과 추억만이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자신도 묵인했던 어떠한 부조리나 올바르지 못함은 기억에서 덮는다. 그리고 그것을 누군가 고발했을 때, "전통이다", "그럴 수도 있다", "적응하지 못한 사람의 불만, 하소연이다"라며 그것을 덮어버리려고 달려든다. 우리는 그 과정을 봤다. 당시의 사건에서, 고발자는 익명을 철저히 지켰다. 고발자의 삶은 파괴되지 못했다. 그러나 선배들이 보인 반응은, 과연 고발자가 익명을 지키지 못했다면 과에서 어떤 입장에 처했을지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어느 정도 선에서 정리됐고, 나도 그다지 다시 언급하고 싶지는 않은 사건이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일이 끝난 이후에도, 그들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현대사회에서 내부고발자가 서는 위치는, 딱 그 정도다. 조금 격하게 말한다면 "당해도 싼 배신자" 정도.

 

고발영화와 상업영화의 균형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상업영화다. 고발영화라는 타이틀을 내건 상업영화.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사실만을 추구하는 영화는 아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적절한 균형점을 찾았다.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지 않는, 딱 맞는 균형점. 지나치게 고발에 치중하지도, 그렇다고 상업영화로서 선정적인 장면을 대거 쏟아붓지도 않았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우리가 캐서린이 된 것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UN의 수많은 조직원들에게 분노한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고발영화의 표본같은 영화다.

 

   물론 영화는 자극적이다. 18세미만 관람불가도 받았다. 영화 초반에는 뜬금없는 정사씬도 들어가있다. 그렇지만 영화의 초반부를 지나는 순간부터, 우리에게 남는 감정은 분노 뿐이다. 지극히 분노와 고발에 치중하고 있는 영화. 사회적 약자에게 이루어지는 폭력과, 그 과정에서 그것을 묵인하고 조직적으로 덮으려고 나서는 유엔은,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의 상징, 전후 평화유지의 선도자인 그 유엔이 아니다. 유엔은 공공의 적으로 그려진다. 영화가 가진 자극성은 이러한 구도에서 유엔을 고발하는 훌륭한 수단이 된다. 이렇게 자극적인 행위가, 이렇게 스크린에 담기조차 역겨울 수 있는 화면들이, 모두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며, 아니 실제로 이루어진 것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모두 UN과 OHCHR(유엔인권고등판무관)에 의해 자행되거나 묵인되었다는 사실을 까발린다. OHCHR의 HR, Human Rights가 눈에 설다. 이러한 일이 자행된 곳에, 그들이 있었다. 영화는 자극성을 무기로 이러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는 셈이다.

 

정의롭고 가치로운 삶

   정의롭거나, 자신이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일, 그럼에도 자신이 개척해야하는 일에는 항상 험난함이 따른다. 그러한 험난함이 없었다면 다른 누군가가 그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대개 새로운 일은 힘든 법이다. 그것이 내부고발일 수도 있고, 내부고발의 수준에 이르지는 않더라도 어떤 조직의 폐해를 바꾸려고 달려드는 일은 험난하다. 누군가의 지탄을 받을 수도 있다. 대개 조직사회에서 그런 이들은 꺼려지기 마련이다. 궁지로 내몰리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그 길 위에서 흘린 피 위에서 우리 사회는 조금씩 발전해왔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도, 국제사회도, 그런 누군가의 희생에 뿌리하고 있다. 새삼 그런 생각을 되새게가 만드는 영화다. 국제사회에 종사하고자 하는 생각은 별로 없지만, 국제기구가 어떤 위치에 서야하는가, 그들의 정의는 어디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서 성립해야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이미지 맵

    영화/미국 다른 글

    이전 글

    다음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