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와 1년의 가치

내가 재수를 성공리에 마쳤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어느 정도 남았지만, 어쨌든 11월 18일 고대 논술고사를 끝으로 재수생활이 완전히 끝이 났다. 얻은 것도 많았고 잃은 것도 많았던 생활. 어느 생활이나 그렇겠지만 장점과 단점이 뒤섞인 생활... 나 자신에게 한 번  더 하라고 하면 절대 못할 거 같지만, 재수라는 행위 자체가 그냥 1년을 꼴아박고 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꽤 있는 것 같아서 그래도 몇 자 적어둬본다. 뭐 그다지 보게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재수를 고민하고 있다면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기도 하고..


사실 재수에 대한 조언은 대부분 재수를 경험했든 경험하지 않았든 수험생활을 마친 사람에게 듣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의 입장에서 재수에 대한 조언이 얼마나 의미없는 것인지는 자명해진다. 자신의 저서 <미래의 법률가에게>에서 앨런 더쇼비츠가 밝힌 바와 같이, 모든 조언은 철저하게 개인화된 조언이다. 조언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있어서 최선의 조언을 해주는 것이겠지만,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 조언은 독이 될 수도 있다. 우리 일상 생활은 언제나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조언이 모든 사람에게 맞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언을 받아들일 때는 철저하게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재수에 대한 조언이 유난히 더 개인화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 성격에 있다. 학원 다니면서 선생님에게 들었던 바와 같이, 재수를 경험한 사람의 조언은 이 한 마디로 정리된다. 재수한 기억은 성공하면 모두 좋은 기억이 되고 실패하면 아깝게 1년을 버린 기억이 된다. 재수에 대해 긍정적인 조언을 하는 사람은 대개 재수에 성공한 사람이고, 부정적인 조언을 하는 사람은 대개 실패한 사람이다. 재수를 안해본 사람의 조언은 대개 막연하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재수생활 1년이 가지는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재수생활 1년은 그만큼 힘들고, 동시에 가치있는 시간이 될 수 있음과 동시에 옆길로 새서 후회의 시간이 되기도 쉽다. 그건 말 그대로 재수 해본 사람만 아는 거다.


재수의 성공률이 정확히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재수는 성공을 전제한다면 1년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자신의 학벌을 높인다는 의미에 한정되지 않는다. 재수는 자신의 가장 치열한 시기가 되기에 최고의 기회다. 그것은 좋은 의미에서의 기회는 아닐터다. 오히려 어쩔 수 없이 치열해져야하기 때문에 더 최고의 기회가 되는 셈이다. 왜 이런게 날 괴롭히나, 라며 현역시절 불평하던 내신도 없다. 학원에 따라 차이도 있지만 학교에 비하면 생활지도도 거의 없는 편이다. 솔직히 종로학원에 다닐 때의 생활은 꽤 엄격한 교칙을 적용하던 내 모교에서의 생활과 비교해보면 거의 자유방임과 마찬가지였다. 물론 여전히 종로학원 생활지도 선생님들이 왜 규제하는지 모르겠는 조항이 있는건 사실이지만, 분명히 자신의 모든 것을 자신의 꿈을 위해 부을 수 있는 시간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재수 자체를 긍정하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재수를 고민한다면, 그걸 해서는 안되는 짓으로 치부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내가 재수를 결정할 때부터 지금까지도 가장 싫어하는 말은 '죄수생'이다. 현역으로 한 번에 대학 가는 것에 비해 부모님에게 죄를 짓는다... 라는 표현은 분명 일리가 있다. 재수는 확실히 비용이 많이 든다. 기숙학원 등에 들어가지 않고, 집 가까운 데에 있는 학원을 다닌다고 전제할 때 남종을 기준으로 하면 대충 8개월 반 x 84만원이 나온다. 대충 700만원 좀 넘는 돈이다. 이런 비용을 물론 우리가 부담하지 않고 부모님이 부담한다. 죄를 짓는다는 말에 일리가 있다는 소리다.


그런데 재수를 과연 죄를 짓는 것인가? 나는 재수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피해야할 것이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라고 생각한다. 재수를 죄수로 연결짓는 순간, 재수생으로서의 자신의 근본적인 부분에서 이미 자괴감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따라서, 이러한 생각은 최대한 빨리 버리기를 권한다. 사실 학원을 다니면서 재수를 하게 되면(나 역시 독학재수를 경험해본 바가 없어서 그에 대한 조언은 어렵겠다), 재수생은 현역시절보다 훨씬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기 쉬운 환경에 처하게 된다. 전반적으로 주변 아이들의 성적이 높아지기 때문에(특목고나 특성화고같은 경우는 좀 다르겠지만) 학교 다닐 때보다 자신의 등수는 확연하게 뒤로 밀려난다. 그리고 주변에 자신보다 뛰어난 친구가 얼마나 많은가에 대해 놀랄 수 밖에 없다. 자신이 꽤 한다라고 생각했던 학생들이 마음을 고쳐먹는다. 말이 좋아 마음을 고쳐먹는다지, 여기서 소위 '멘붕'을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재수는, 학원에 있는 친구와의 대결이 아니다. 굳이 누군가와의 대결이라고 묶으라고 한다면 오히려 69만 수험생 전부일테고, 거기에서 학원에 있는 친구들과의 경쟁에서 지더라도, 충분한 자리가 남는다. 그러니까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다면, 그들을 아예 자신의 경쟁 대상에서 빼버려도 무방하단 소리다. 물론 쉽지 않다. 아니,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재수는 자기 자신과의 대결이라는 점을 절대 잊지 않았으면 한다. 재수 초기에 난 친구도 안사귀고 공부만 하면서 1년을 보내겠다, 라는 마인드로 들어오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이게 실제로 이루기도 어려울 뿐더러 자신의 고립을 초래해서 생활을 오히려 힘들게 할 뿐이다. 이런 마인드는 접어두는게 좋다.


그럼 내가 왜 재수 자체를 긍정하지 않느냐?  이부분은 재수를 결정해야하는 입장에 서있는 친구들에게는 전혀 무관한 소린데.. 나는 굳이 재수까지 해서 대학을 다시 선택해야할 정도의 학벌에 대한 이 풍조 자체를 긍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성인군자처럼 대학 그거 아무것도 아니요, 하면서 학교 생활을 한 것도 아니고, 몇몇 학생운동을 하는 친구들처럼 수능을 거부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나는 나름 철저하게 수능을 준비했고, 거기에서 최선의 결과를 얻어내려고 했으며, 결국 재수까지 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교육제도가 곧 입시제도가 아니라면, 그러니까 입시제도=교육제도가 아니라 입시제도는 교육제도에 따라오는 부분에 불과한 것이 맞다면, 나는 이러한 분위기가 없어져야 옳다고 생각한다. 재수하는 것 자체가 보편화가 되어가고 있는 이 추세를 긍정해선 안된다는 거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재수는 여러분에게 있어 하나의 기회다. 재수를 했던 기억이 삶의 발판이 되어줄 수도 있다. 그렇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충분히 충실하게 준비하고 노력하는 재수 생활이 된다면, 재수 생활의 기억이 꼭 나쁜 기억이 되지만은 않을 것이다. 좋은 학벌은 그에 따라오는 작은 보상일 뿐이다.. 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재수 생활의 최고의 목표는 좋은 대학, 좋은 학과다. 맞는 말이다. 오히려 정서적인 부분이 그에 따라오는 작은 보상이라고 표현하는게 옳겠다. 그러나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대학은 좀 더 여러분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고, 또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좀 덜 여러분의 인생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되겠다.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이미지 맵

    글/글로 돌아오다 다른 글

    이전 글

    다음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