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이란 나쁜 것인가

얼마전 동아리에서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윤리에 관한 토론을 하면서, 중간에 받은 질문이 있었다. 포퓰리즘이란 나쁜 것인가? 라는 질문이었다. 글쎄, 포퓰리즘이란 나쁜 것일까? 선뜻 답하지 못했던 것은, 우리의 첫 토론이 우리 생각이 아닌 전문가의 생각으로 뒤범벅이 되어있었던 탓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보다도 우리가 포퓰리즘을 정확히 정의내리지 못하고 있었던 원인이 크다. 인기영합주의(人氣迎合主義)라고 번역되는 포퓰리즘은 사실 우리말로 옮겨놓더라도 어색하기 그지없다. 대중영합주의라는 표현이 좀 더 이해하기는 쉽다. 대중과 영합한다, 정확히는 대중의 요구와 영합한다. 자기의 주장 없이 다른 사람의 뜻에만 맞추려고 하는 것을 영합주의라고 한다고는 하지만, 사실 이러한 의미와는 조금의 차이가 있다.

넓은 의미의 포퓰리즘
학자들이 포퓰리즘을 어떠한 범위까지 확대시키고 있는지 나는 정확히 아는 바가 없다. 신진욱 교수(중앙대 사회학과)에 따르면, 포퓰리즘은 인민(populus)에서 파생된 단어라고 한다. 민중을 받드는 정치, 그것이 포퓰리즘의 표면적인 의미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처럼, 포퓰리즘은 일면 대중민주주의와 통하는 바가 있다. 무엇보다 대중의 뜻을 다른다는 점은 이 둘이 가진 무엇보다 큰 공통점이다.

포퓰리즘을 이러한 대중민주주의까지 확대할 경우, 포퓰리즘은 일반적으로 쓰일 때보다 훨씬 가치중립적인 상태가 된다. 즉 그 자체가 부정적인 의미도 긍정적인 의미도 포함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포퓰리즘의 의미를 넓혔을 때는 좁은 의미의 포퓰리즘을 포함하고(부정적인 의미), 거기에 대중민주주의의 기본 이념(긍정적인)까지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포퓰리즘 그 자체는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좁은 의미의 포퓰리즘
그러나 포퓰리즘이 일반적으로 쓰이는 의미를 보면, 이 단어가 얼마나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좁은 의미에서 포퓰리즘은 대중의 의미를 따르는 '척'만 하는 정치가 된다. 앞의 신진욱 교수는 한겨레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역사적 심성구조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파괴력도 갖고 있다. 내셔널리즘, 나치즘, 파시즘, 근본주의, 신자유주의 등 현대의 정치운동 대부분은 ‘포퓰러’한 요소를 적극적으로 동원했다. 1920~30년대 유럽을 휩쓴 파시즘 운동은 민중적·혁명적 요소를 강조했고, 바로 그것이 열광적 대중동원과 충성을 가능케 했다.
한겨레, <'대중민주주의'와 '포퓰리즘' 구분해야>

좁은 의미로 포퓰리즘을 풀이할 경우 대부분 그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의미에 주목하게 된다. 이러한 포퓰리즘은 노무현 대통령 시절부터 표면으로 올라오기 시작했고, 대중적으로 상당히 널리쓰이는 용어가 되었다. 이 때의 포퓰리즘은 광의라기보다는 협의로서의 포퓰리즘이다.

이러한 풀이는 포퓰리즘의 성격을 상당히 가식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포퓰리즘은 겉으로는 대중을 위하고 대중의 뜻을 따르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 정치의 주체로 대중이 나설 수는 없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이러한 포퓰리즘을 통해 말 그대로 '인기'를 얻은 정권들이 민주주의 그 자체를 위협한다고 풀이한다.

어느 범위까지 확대시켜야하나
포퓰리즘을 구분하자고 하는 것이 학계의 주된 흐름일지는 모르나, 사견으로는 포퓰리즘이 반드시 부정적인 의미로만 풀이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용어 자체가 모호하고, 정확한 정의를 아무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시점에서 포퓰리즘을 반드시 나쁜 것으로만 풀이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포퓰리즘 의미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현대 민주주의가 가진 양면성이 아닐까? 신진욱 교수는 포퓰리즘과 포퓰러 민주주의(=대중민주주의)를 구분하자고 하였지만, 그것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대중민주주의의 부정적인 면모가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로 정의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학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바와같이 용어 자체의 폐기도 솔깃한 제안이다.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사용되는 단어 그 자체를 폐기하고, 부정적인 의미만을 명확히 표현하는 새로운 용어를 정하는 것이 오히려 혼란을 줄여주는데 일조할 것이다. 이러한 혼란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에서는 한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상당히 높은 비중으로 비난을 위해 사용된다는 것이다. 물론 협의로서, 즉 부정적인 의미로 풀이하고 있는 것이라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 현상 자체를 풀이하기보다 정치계에서 상대방의 어떠한 정책을 비난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의 속에 현재 최고의 이슈 중 하나인 '보편적 윤리'와 '선별적 윤리'의 문제가 있다. 그것이 (좁은 의미로의)포퓰리즘이라고 매도된 것이 정말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대중의 원하는 것을 잘 끌고 들어왔는데 반대하는 쪽에서 그냥 비판하고 있는 것인지는 시간이 지나봐야안다. 그렇지만 이 '포퓰리즘'이라는 어휘 사용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진보와 보수 사이의 반목 사이에서 잘못 적용될 소지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그런데 포퓰리즘이라는 어휘의 사용은 이러한 상황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남발되고 있다. 정책의 추진 자체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동한다.

상대방을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한다는 것은, 그것이 곧 대중의 뜻임을 알고 있다는 역설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이 포퓰리즘적인 것이다!"라는 것은 "너는 인기를 위해 대중이 원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현대 민주주의는 대의 민주정치다. 국회의원은 우리에게 권리를 위임받은 것이지, 하늘에게서 그 권리를 위임받아 우리를 다스려야할 인재가 아니다. 우리를, 대중을 대신해 대중의 뜻을 실현해야할 국회의원들이 대중의 뜻을 따른다고 비판하는 일이 과연 정상적인 일인 것일까. 정상적인 일이라면, 대의민주주의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러한 생각은 대의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을 무시할 우려가 있다.

이러한 포퓰리즘의 비판 근거로 "대중이 잘못된 판단을 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가 언급되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대중은 더이상 '우매한 백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판단이 왜 잘못된 것인지 명백한 근거를 제대로 제시하지도 못하면서, 그저 대중이 멍청해서, 대중의 잘못된 판단이라서, 라는 이유를 들면서 포퓰리즘을 비판한다면, 그것은 웃긴 일일 수 밖에 없다.

포퓰리즘 그 자체가 가진 한계도 있다. 어떠한 정책이 만장일치의 동의를 받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한 나라에, 한 사회에, 한 지역에 살면서도 서로 다른 가치를, 종교를, 직업을 가지고 사는 현대사회에서, 포퓰리즘은 과연 어떠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을까. 정치인 역시도 이렇게 다원화된 개인인 이상, 그들이 추진하는 정책도 그러한 가치를 품을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결국 아무리 '포퓰리즘'적으로 대중과 영합한다고 할지라도, 그 대상이 전국민으로 확대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포퓰리즘의 재정의가 필요한 이유다.

참고한 글들
<인기영합주의>, 위키백과
<포퓰리즘이란 무엇인가?>, image or real, 용짱님
<'대중민주주의'와 '포퓰리즘' 구분해야>, 한겨레, 신진욱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포퓰리즘>, 『국가전략』2004년 제10권 3호, 강진세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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