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리터의 눈물(1リットルの涙, 2005)

~이렇게 웃으면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적어도 1리터는 되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INTRO

 사실 이 드라마는, 모두에게 손꼽히는 수작이지만, 볼까 말까는 고민을 거듭했고 그러면서 1편 도입부는 거짓말 안하고 수십번은 봤을 정도로 진도를 나가지 못했었다. 그렇지만 역시 시험기간도 겹치고, 정말 정주행으로 빠르게 달려버렸다. 드라마 자체는 만족스럽지만, 결국 내용은 너무나도 비극적이었던 드라마. 내가 슬픈 드라마나 영화 같은 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고, 사실은 그렇게 눈물을 흘리는 것은 상당히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행동 중 하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드라마를 미뤘던건, 병에 걸린 한 소녀의  이야기가 과연 나에게 힘을 줄지, 아니면 나에게 슬픔만을 안겨줄지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드라마를 그렇게, 힘을 얻고자 해서 보는 것은 아닌데, 내가 보려고 했던 시점이 슬픔에 잠겨야하는 시점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위해 달려야하는 시점이었고, 그런 순간에 슬픈 드라마야말로 극약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은 조금 더 천천히 템포를 늦춰서 보기 시작했던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는, 내가 태어나서 두 번째로 본 일본 드라마이자, 정말로 보면서 눈물을 흘렸던 드라마. 사실 나 혼자서 드라마를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는게, 제3자의 눈으로 보면 굉장히 기묘한 모습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은 들지만, 정말로 눈물을 흘리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내가 감수성이 없는 메마른 사람인 것도 아니고, 정말로 눈물은 다른 사람이 흘리는 정도는 흘리기 때문에 그다지 특별할 것은 없다. 선덕여왕 마지막편도 보고 울고, 사실 되새겨보면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울어버린 경험은 꽤나 많다. 그렇지만, 11편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수 있는 시간동안 내가 받은 슬픔은 동정과 연민 같은 감정에서 나오는 슬픔이라기 보다 슬픔 그 자체로 인한 슬픔이었던 것 같다. 굳이 풀이하자면 나는 이 드라마에서 슬픔 그 자체와 마주친 것이다.
 

소녀에겐 너무 버거웠던 “척수소뇌변성증”

엄마, 난 왜 살고 있는거야? (11화 中)

 내용은 척수소뇌변성증이라고하는 소뇌 병에 걸린 한 소녀가 죽기까지 남긴 일기를 기반으로 한 그녀의 이야기. 기토 아야의 수필집 <1리터의 눈물>을 원작으로 해 제작된 드라마로서 극적인 내용을 위해 여러가지 장치도 설치하고 내용도 각색하면서(사실 각색은 굉장히 잘 되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내용은 상당히 변했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게 진짜든 가짜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이런 삶을 살아가며 건강한 이들을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겠구나. 자꾸 그런 생각이 들게 했다.
 진행성 병에 걸리면 어떤 기분인 것일까. 나는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없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잔인한 표현인 것은 알지만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진행성 질병에 걸렸다”라는 것만으로 그것은 굉장한 악몽이고, 삶을 살아갈 의지를 잃어버렸을 것이리라. 나에겐 그녀처럼, 세상을 견뎌내고 이겨나갈 힘이 없다.

척수 소뇌 변성증이란

실제로 척수소뇌변성증이란 이름은 일본어 직역이고, 우리나라에선 다계통위축(소뇌위축증)이란 표현을 쓰고 있는 모양.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제공하고 있는 자료를 참고하면 파킨슨 증상, 소뇌 증상, 자율신경계 증상이 나타나며 증상시작 3~5년이면 단독 보행이 어려워지고 개인에 따른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진행속도가 상당히 빠른 질병.

병은 왜 나를 선택한걸까?

왜 제가... 왜 제가 병에 걸린거죠? (3화 中)

왜 내가 병에 걸린걸까. 운명같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거야.
「1리터의 눈물」3화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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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은 왜 나를 선택한걸까? 라고 묻는 그녀의 질문을 과연 누가 대답할 수 있을까. 왜 하필 나야, 라는 그 생각은, 그 어떠한 가식도 없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그녀에게는 명확한 꿈이 있었꼬 그것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왜, 도대체 하필이면 왜 그녀를 척수소뇌변성증이라고 하는 무서운 병이 덮친 것일까. 자신의 앞에 놓인 그런 비극적인 상황앞에서, 아니 비극적이라기보다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그녀는 자꾸 묻는다. 왜 하필이면 나야, 하고. 그것은 병에 걸린 본인을 인정할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곧 자신의 병을, 겉으로나마 인정하게 된다. 자신을 인정하고, 자신이 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들을 깔끔하게 포기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위해 노력하자. 그녀는 그렇게 다짐한다. 자신이 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들…… 자신이 그토록 좋아했던 농구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끝까지, 병이라는 것을 이겨내보이기 위해서, 자신이 정상이었을 때 하던 것을 조금이라도 계속 하고자 노력한다. 그렇지만 소뇌척수변성증은 진행성 질환. 그녀의 병은 점점 심해졌고, 병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녀가 할 수 있는 일들이 하나 둘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진정으로 자신의 병을 인정했다. 나에게 불가능한 것이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래, 나에겐 불가능한 것이 있어, 그러니까 할 수 있는 것만큼은 더 열심하자라고. 그것은 기존의 것과 비슷하게 보일 수 있는 다짐이었지만, 어쩌면 가장 다른 다짐이기도 했다. 그 의지의 본질이 달랐다. 내가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일반인일 때의 그림자를 쫓는게 아니라,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서 최대한 노력하자라는 다짐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러는 도중에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 둘 사라지고 있었다.
 

어떤 것이 옳은거야? 할 수 있는걸 하는 일, 아니면 나를 인정하는 일?

 그러면서 동시에, 아야는 큰 장벽에 부딪히게 된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 둘 없어지지만, 그녀의 모든 능력은 하나 둘 퇴화되어가지만, 척수소뇌변성증은 신경계 질환일 뿐 실제로 정신 연령은 그대로다. 정신은 그대로인데, 머리는 그대로인데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역시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동시에 아야가 겪고 있는 그 갈등- 즉, 병에 걸리기 전에 했던 일들 중 아직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해나가는 것과, 자신의 병을 인정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옳은 것이냐라는 그 갈등은 나로서도 답을 할 수 없었고 아마 누구나가 마찬가지였을 것이리라.

결국 아야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의 장애를 인정하게 된다


 지금의 나는, 지극히 감성적이 되어버린 지금의 나로서는 아마 후자를 선택할 것 같다. 병에 걸린 나, 아야 말 처럼 병 그 자체도 나의 일부다. 그런 나를 사랑하고, 남은 기간동안, “지금의 나”로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쪽이 낫지 않을까.
 

일기는, 내가 사는 의미야.

무서워. 지금 생각하는 걸 쓰지 않으면 내일이면 잊어 버리고, 없어져 버리잖아. 일기는, 지금 내가 살고 있다는 증거야. 아야한테는 쓰는 일이 있다고 말했잖아. 엄마가, 내가 사는 의미를 찾아 준 거야.
「1리터의 눈물」3화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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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그녀를 사로잡은 것은, 의사의 권유를 받아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일기’였다. 이미 그녀는 수많은 일기를 써왔었다. 어쩌면 이러한 일기 조차도, 그 전까지 써왔던 것만큼은 ‘일반인이었던 나를 따라가는 것’, 또는 ‘장애 그 자체를 부정하는’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일기에서 자신이 살아가는 의미를 찾은 그녀는, 자신이 가졌던 꿈- 즉 “다른 사람을 돕고 싶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라고 하는 꿈을 자신의 일기를 통해 이루게 된다. 그녀에게 일기는 자신의 기록이었고 자신이 살아있음을 말해주는 증거였고 무엇보다 삶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녀는 계쏙해서 일기를 써나간다. 어쩌면 그녀의 어머니 말대로, 아야는 “일반인도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낸” 대단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도 일기를 써왔지만 일기를 그렇게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순간 지쳐버리기도 하고 어느 순간 귀찮아져서 내팽겨쳐버리기도 한다. 아야는 그런 일을 해낸 것이었다.
 그러면서 오랫동안 뒤로 미뤄왔던 일기를 다시 잡아보게 되었다. 오랜만에 노트에 끄적이는 일이란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역시 손으로 많은 글자를 쓰는게 이제는 꽤나 어색해진 것 같아 아쉽기도 했다. 아무래도 내가 블로그를 시작하고, 블로그에 글을 착실히 쌓아가게 되면서, 손으로 쓰는 거라곤 문제풀이나 수업 노트정리, 그 외에 사적인 부분에서야 메모 정도 밖에 없기 때문이겠지.
 그렇지만 역시 한 편 한 편 봐나갈수록 가슴속 깊이에 일기가 와닿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랜만에 다시 일기를 잡았다. 물론 얼마전에 형이 노트북을 돌려주고 갔기 때문에, 비록 성능 자체는 꽤나 오래된 노트북이니만큼 좋은 편은 아니겠지만 충분히 가능할거라고 생각해… 나중에, 천천히 적어나가서 어느정도 분량이 된다면 제책하는 걸로, 노트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기로 했다.

진정한 의사의 모습

의사로서 자신의 한계에 직면한 미즈노 교수.

 드라마에서 죠난 대학 미즈노 교수라는 사람이 주치의로 나오는데(원래는 여의사였다고 한다) 그 사람의 모습 하나하나에서 어릴 때 내가 감히 꿈꿨던 "의사"라는 직업의 진정한 매력을 느꼈다. 그래, 내가 의사가 되고 싶은 건 저런 것이었지... 싶었다. 환자를 위해 아파할 수 있고, 자기를 희생해서 환자를 살릴 수 있는 그런 의사. 우리 사회엔 그런 의사가 별로 없지만, 드라마에서 미즈노 교수는... 말 그대로였다. 내가 꿈꿨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의 의사였다.
 

실제론 그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1리터의 눈물이라는 작품에는 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물론 그 작품성도 굉장했고 담고 있는 이야기도, 심지어 각본 그 자체도 잘 쓰여진 것으로 평가될 정도이니 작품의 우수성은 말 다했다. 그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기토 아야의 동명의 수필집도, 희망을 주는 수필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1리터의 눈물을 읽어본다면(나는 읽어본지가 하도 오래되서 뭐가 옳은지는 잘 모르겠으나) 많은걸 느낄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드라마와 실화의 내용이 상당히 차이가 난다는 점일 것이다. 실제의 이야기는 그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니다. 아름답다기 보다 잔인하고, 처절하며, 그렇지만, 아니 그렇기에 우리에게 힘을 주고 무엇보다 밝은 이야기다. 실제로 드라마에서처럼 감동적인 사랑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물론 핸드폰도 없었다(시대 자체가 핸드폰이 일반적인 통신수단으로 사용되기 전의 이야기다)

슬프지만,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드라마

 건강의 중요성만큼이나 이 드라마가 전하고 있는 것은 삶 그 자체의 의미. 우리 삶이란건 어떤 걸까. 나는 내가 그 삶을 아껴왔고 소중히 써왔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나의 삶도 어느새 꽤나 대충대충, 여기까지 살아와버린건 아닌지. 저렇게 아파하면서, 자신의 꿈을 가지고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내 꿈을 이룰 수 있는 자리에서 왜 이렇게 나태하게 주저앉아있는지. 그런걸 생각하다보면 자꾸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러나 역시 보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봐둬야할 드라마. 가슴이 따뜻해지고, 장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개하고, 궁극적으로는 삶의 중요성, 친구와 가족의 무한한 사랑과 따뜻함, 그리고 그 중요성, 장애를 극복하고 그 삶을 살아가겠다는 주인공의 강한 의지를 온몸으로 느끼게 하는 드라마. 이렇게 길게 써도, 그 내용을 다 담을 수가 없을 정도로.

마지막까지, 나를 울게 했던 그 대목.


Outro

 드라마는 사실 보는 내내 울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앞부분에선 거의 울지 않았고, 후반부에서는 거의 보는 내내 울었다고 해도 될정도로 많은 눈물을 흘렸다. 사실 드라마같은걸 보면서 원래 잘 우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나서 오묘한 느낌이 남았다. 그래, 내가 지금 여기서 좌절하고 있을 때가 아니구나. 지금 힘들더라도 한 보 더 나가자. 한 발 더 내딛자. 그런, 알 수 없는 의지가 가슴속 깊이에서 끓어오르는 것이었다.
 사랑의 의미, 삶의 의미, 친구의 의미, 가족의 의미, 진정한 의사의 모습 등, 너무나도 많은 것을 느낀 드라마였지만, 그런 작품 내의 내용에서 조금 멀어지자면, 우리나라에서는 왜 이런 "내용있는" 드라마는 나오지 못하는 걸까, 아니 나오더라도 순식간에 매장되어버리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나는 일본 드라마 쪽의 분위기는 잘 모른다. 아마 우리나라와 큰 차이는 나지 않을테지만, 우리 나라와 달리 이런 드라마 일본에서는 히트를 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우리나라 드라마들의 천편일률적인 사랑 일색의 내용, 거기에 좀 더 나간 드라마들이 가득 담고 있는 패륜, 불륜, 배신, 복수로 얼룩진 그 각본들에 대해, 이제 우리는 다시 살펴봐야할 때는 아닌가. 드라마는 물론 쾌락을 위한 미디어이지만, 동시에 깊이있는 드라마가 가지는 의미도 무시할 수 없다. 마치 쾌락만을 추구하는 것같은 한국 드라마는, 과연 이 상태로 한류를 얼마나 더 유지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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