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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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일기를 쓰는걸 정말 오랫동안 안했다. 재수 때는 일기를 워드 파일에 따로 썼다. 남들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 한 번 크게 멘붕했었지만, 사실 재수 때는 멘붕이 일상이었다. 멘탈을 으깨고 다시 조립하는 반복이었다. 내가 1년간, 매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1달에 1편 씩이라도 꾸준하게 1년을 채운 일기는 재수 때 일기 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 때의 일기에 손이 쉽게 가지 않는건, 아마 그런 일기라서일거다. 주로 힘들 때만 일기를 썼다. 모의고사를 봤어, 점수가 엄청 올랐어! 대박이야! 이런 이야기는 어지간하면 안썼다. 오늘 문득 재수 때 썼던 노트며 생활기록장을 다시 보게됐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그 때는 생활 자체가 너무 힘들었다. 다시 하라면 절대 못할 정도로. 그래서, 기쁜건 일기에 쓸 수가 없었다. 아무리 기뻐봤자 힘든 재수의 부분이었으니까. 반대로 힘든건 어딘가에 풀어놔야만 했다. 그게 일기였다. 


물론 요즘 일기도 마찬가지. 너무 힘들어서 얼마전에 비공개로 글을 한 편 썼다. 조금 썰을 풀어놓고나니 마음이 좀 풀렸다. 그래서 다시 일기를 써야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뭐 딱 그 정도. 감성 페북같은거 한 수 접게 만드는 이게 바로 감성 블로그질. 사실은 감성 일기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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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깨지고 나면 다시 돌아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번 깨진 유리병을 다시 붙여서 원상태로 만드는게 불가능인 것처럼. 일단 다치고 나면, 궁지에 몰리고 나면, 이번에도 안될거야, 내가 이렇게 해봤자... 라는 태도로 한 발 뒤로 물러나게 된다. 그게 딱 지금의 내 상태.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없는건 아닌데,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게 쉽지 않다. 깨지고 나니 지금까지 내가 해온게 잘못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일단 그 때 행동을 그대로 따라갈 수 없는 탓도 있고.. 군대라도 다녀오면 마음편하게 다시 임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게 되진 않겠지만.


중학교 때까진 안이랬던 것 같다. 시작은 고등학교 쯤이 아니었을까. 상처를 쉽게 받는 타입이 되었다. 누구한테 뜬금없이 "나 상처 쉽게 받음ㅋ"하고 말하고 시작할 수는 없는 일이니, 내가 내 입으로 말하고 다니지는 않지만. 사실 고등학교 땐 상처받는걸 전혀 통제하지 못했었다. 반대로 대학생 땐 어느 정도 선까지는 무조건 안으로 꾹꾹 눌러담았고. 그렇게 꾹꾹 눌러담고 눌러담고 눌러담다가 터진게 이번 멘붕이었고. 글쎄.. 나는 아직도 답을 못찾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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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거고, 정치학과를 희망하고 있지만(정외라는 말보단 정치학과라는 말이 훨씬 듣기 좋은 것 같다), 사실 듣고 있는 수업은 정치학개론 하나다. 물론 수업은 정말 재밌다. 그렇지만 이런 대학생활을 하다보니, 정치학이 공부하고 싶었다. 그래서 개론 교재로 사용되기도 한다는 앤드류 헤이우드의 <정치학> 책을 빌렸다. 물론 이 두꺼운 전공교재를 어떻게 해야할지는 모르겠다. 이미 빌려놓은 책이 산더미라서.. 과연 시험기간 들어가기 전에 완독하고 반납할 수 있을까가 걱정이다. 그 사이에 니체에 대한 관심이 살아나서 니체 책도 한 권 빌렸는데. 


요즘은 소설이 잘 읽히지 않는다. 소설을 읽으면서 와, 재밌어, 재밌긴 한데.. 이런 식이 되버린다. 오래 잡고 있질 못하겠다. 사실 드라마나 영화도 마찬가지고. 그만큼 내 감수성이 무뎌진걸까. 어쨌든 그래서인지 요즘은 비문학 쪽의 책이 훨씬 땡긴다. 책을 딱 잡았을 때 들어가기는 문학이 훨씬 좋은데, 끝을 보기 위해서 달릴 때는 비문학이 훨씬 좋은 것 같다. 그래서 요즘 읽고 있는 책이 <표창원, 보수의 품격>.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할거지만 표창원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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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정말 정신없이 바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학교에 처음 들어왔을 때, 아직 동아리 거리제를 시작하기도 전에 나는 동아리를 선택했고 최우선순위를 동아리에 뒀다. 그러면서도 사실 1주일은 굉장히 널널했기 때문에(항상 겹치는게 문제였지, 정신없이 바쁘지는 않았다) 뭔가 다른걸 하고 싶었다. 이것저것 손을 대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물론 그 결과 지금 나는 정말로 정신이 없다. 뭐랄까, 왠지 이건 열심히 해야겠어!! 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자꾸 어디선가 왜 이렇게 힘들지.. 하는 마음이 들어서 포기하게 된다. 이러면 안되는데. 사실 별로 바쁘지도 않은데.


허정수 교수님이 들으면 아마 "자본주의에 익숙해지심ㅋ"이라고 하실 것 같은 이야기를 해보자면, 나는 한동안 내 몸을 막굴리는 데에 묘한 동경이 있었다. 정말 정신없이 바쁘고, 그래서 정말로 정신이 없고, 그러다 탈날 정도로 힘들어도 보고. 그런데에 정말로 알 수 없는, 쓸모없는, 한심한 동경이 있었다. 지금은 되게 염세주의자마냥 편한게 좋은거지, 편하게하자 편하게..라고 하고는 있지만.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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