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내보이기

어느 순간부터, 일기라는걸 굉장히 좋아하게 됐다. 일기를 쓰는 그 순간도 즐겁지만, 역시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한다면 일기를 다시 펴보는 순간일 것이다. 그렇게 가끔씩 펴보는 일기가 깨알같은 재미를 준다. 그런데 이런 깨알같은 재미는 사실 자신의 일기를 볼 때보다 다른 사람의 일기를 볼 때가 더 크다. 그건 깨알같은 재미를 넘어서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재미를 준다. 타인의 생활을 훔쳐보는, 그 불순한, 그러나 재밌는 '훔쳐보기'는, 반대로 자신의 일기장을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연결된다. 왜, 그래서 선생님에게조차도 자신의 일기를 보이고 싶지 않아 비밀일기장과 제출용 일기장을 따로 만든다는 이야기는 꽤 유명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데 그런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컴퓨터라는 새로운 '필기 수단'과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소통의 장'이 등장하면서부터였다. 소위 말하는 '일기 블로그'의 등장과, '미니홈피'의 유행, 그리고 그에 이어 끊임없이 번져나가고 있는 각종 SNS의 증가는 자신의 일기, 하다못해 일상의 기록을 대중 앞에서 펼쳐보이게 만들었다. 더이상 일기는 자신만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이런 '일기'의 공유는 블로그의 유행이 조금씩 사그라들면서 같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대로 블로그의 유행을 밀쳐낸 SNS의 등장은 일기 대신 일상 그 자체를, 그것도 블로그가 갖추지못했던 즉시성과 반응성을 세트로 묶어 공유하게 만들었다. 넓은 의미에서는 '일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의 파편 하나 하나를 우리는 인터넷에 흩뿌리게 된 셈이다.

이런 일기의 공유는 기본적으로 텍스트에 의존한 피상적인 관계였던 '인터넷 지인'을 조금 더 가까운 관계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동시에 인터넷 전체를 '친목질'의 장으로 만드는 데에도 공헌했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가지고 온 큰 문제점도 있었다. 일기를 피상적이고 비개인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단순히 오늘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라는 기록을 넘어서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었던 몇 안되는 '사적 공간'이었던 일기장이, 인터넷의 급류를 맞으면서 모두에게 공개되기 사작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를 검열하기 시작한다. 내가 오늘 이런 일을 겪었지만, 과연 내가 이 글을 모두에게 내보여줘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 것이다. 자신에 대한 것은 물론이고 가까운 사람들에 관한 글 하나도 쓰기가 굉장히 부담이 된다. 어쩔 수 없이 일기에는 감정이 배제되고, 진솔함이 배제되고, '주변'이 배제된다. 주변 사람들은 '친구'나 '동료'와 같이 대명사로 대체되어가고, 그들에게 느꼈던 진솔한 감정들 대신 단순한 사건만의 나열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일기는 일기라는 이름을 붙이기 아까울 정도로 '무언가 부족한' 형태가 되어버린다. 과연 나중에 그걸 읽으면서 그래, 이런 때도 있었지, 하고 감상에 잠길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런 옅은 수준의 기록만으로 하루의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기본적으로 블로그라는 매체를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매체로 본다. 따라서 나는 블로그를 일기장으로 사용하는 것 자체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나처럼 많은 사람들이 블로그에 '일기'라는 형태로 쓰는 글과는 별개로 자신만의 일기를 펜으로, 또는 컴퓨터로 만들어서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위와 같은 사항 때문에, "왜 블로그에 일기를 떠벌리는거죠?"라는 의견에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다.

사실은 내가 가장 크게 고민하고 있는 것. 일기의 의미를 되새기고 자꾸 쓰고 싶어지면 쓰고 싶어질 수록, 그 대상은 블로그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 같다. 블로그라는 매체를 '출판의 매체'라고 이름붙이고, 적어도 이 블로그에 쓰여지는 글들은 누군가에게 읽혀진다는 가정하에 쓰기 시작한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블로그는 내 '기록 생활'의 중심지다. (대부분이 감상문이기는 하지만) 그 기록들과 내 일기를 함께 보관해두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단순히 컴퓨터냐 일기냐, 를 떠나서 과연 그 일기를 모두에게 공개해도 좋으냐, 하는 문제는, 역시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어디까지나 이런 글을 쓰게 된 것은 모 블로그에서 일기(거기선 미니홈피였음)에 관한 글을 봐서, 나도 몇 자 적고 싶었던 차에 시간이 생겨서.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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