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토 가나에, <고교입시>



미나토 가나에를 처음 접한 것은 책이 아니라 스크린에서였습니다. 미나토 가나에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고백>이었습니다. 형에게 추천했다가 싸이코패스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을정돌(...) 소름끼치는 면이 함께하는 영화이기는 합니다만, <고백>은 제게 꽤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렇게 원작소설가인 미나토 가나에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고요. 원작소설도 괜찮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미나토 가나에라는 작가에 대해서는 좋은 이미지가 생기긴 했습니다. 생기긴 했는데...


일본 작가들 중에 유난히 그런 작가가 많은 것 같은건 그저 제 취향이 편중되어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은근히 그런 작가들이 있습니다. 분명 어떤 이야기는 무척 재밌고 덕분에 작가 이름만 보고 골라도 되겠어! 하지만 정작 읽으려고 쌓아놓고 읽지 않게되는 작가. 미나토 가나에도 그런 부류의 작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물론 그건 미나토 가나에가 나쁜 작가인게 아니고(아예 펴보지도 못했으니..) 타이밍이 조금 나빴을 뿐일지도 모릅니다. 뭐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건 아니고 그런 작가였더라...하는 겁니다.


요즘 조금 삐뚤어져서인지 뭘 리뷰하더라도 자꾸 태클로 시작하게 되네요. 책 표지는 조금 섬뜩한 면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고교입시>라는 제목은 좀 아쉽지만(너무 직설적이라고 해야하나?) 원제도 고교입시이니 뭐 딱히 번역이 잘못된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원서 표지


그냥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건 표지의 <그 날 하루가 한 영혼의 인생을 짓밟고 있다>라는 자극적인 문구입니다. 사실 이 소설의 본 내용을 툭 터놓고 말하자면, 그 문구 자체가 완전히 틀린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지만, 과연 이게 이 소설을 잘 드러내주는 말인지에는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야기의 주된 내용은 '범인'이 '입시판'을 난장판으로 만들겠다는 건데, 그 배경이 되는 이야기를 풀어보자면 소위 그 '짓밟'힌 '한 영혼'이 꼭 없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 소설이 그 '짓밟힌 영혼'에 주목하냐고 하면 절대 아닙니다.


고교입시를 짓밟아버리자. 이 책을 지배하는 문구인데, 사실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내용입니다. 제가 수능 볼 때도 소위 '학생운동'이라면서 '나는 수능을 거부한다'는 학생도 어디선가 있었고, 우석훈 씨는 순천시민강좌에서 "다같이 수능을 보이콧하자"는 이야기도 했었습니다. 사실 그런 상황을 자주 겪어와서 그런지 이 책도 그런 내용이 아닐까 했지만... 사실은 그냥 단순한 복수극입니다. 그것도 제 눈에는 어찌 되먹은 것인지 알 수 없는 복수극.


툭 까놓고 말하자면 이 책의 범인은 자신의 형이 이 책의 배경인 '이치고' 입시에 실패했던 것을 이유로 복수를 시도한다...는 것인데. 알라딘에서 몇몇 서평을 보니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많더군요. 사실 저는 환경상 학생 입장과 감독관, 출제자, 뭐 그런 사람들의 눈을 함께 보는게 습관처럼 되버려서 더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썩 큰 공감대를 형성할 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제가 그 형과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분노를 터뜨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순 없지만(아니, 오히려 터뜨릴 확률이 월등히 높을 겁니다).


그 학생의 형이 수능을 실패한 이유는 단순명료합니다. 수험번호를 적지 않아서. 그리고 입시요강에는 "수험번호를 적지 않을경우 0점으로 처리한다"는 규정이 분명히 적혀있었습니다. 왜 저자가 이렇게 '100% 정당하지 않은' 상황을 설정했는지는 저도 알 수 없지만, 사실 여기에서부터 분명히 과실은 학생에게 있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그 동생이라는 녀석은 과실이 어디에 있는가와는 전혀 무관하게 이치고에 복수를 시도합니다. 


모순은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이 책에서 범인이 주장하는 복수의 이유는 대충 이런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형은 온 힘을 다해서 이치고를 노렸는데, 간절함이 달랐던 선생 녀석은 수험번호도 제대로 확인해주지 않았어!(물론 확인할 의무는 원래 없음) 간절함이 다른거야! 이런 이치고를 각성시켜야겠다!! 학생들이 피땀어린 노력, 몇 년간의 투자를 학교는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어!!"


모순이 뭐냐면, 이치고의 선생들이 한 명 한 명에게 정성을 쏟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의 노력을 짓밟는다고 단언하면서 복수를 시도하는 범인이, 사실은 그 누구보다 확실하고 비정하게 자신을 제외한 이치고 수험생들의 노력을 짓밟고 있다는 겁니다. 어디에나 희생은 따라는 법이야, 라고 말하고 싶었다면 자신의 입시를,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학교에서 판을 벌였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정말 지망하는 학교에서는 이미 합격증을 받아놓고 말이죠. 결국 일종의 기만이고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수험생들을 인질삼아, 제물삼아 이치고를 엿먹여보고 싶었다는 논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정당했을지언정 방법이 전혀 정당하지 못했단 소립니다. 저는 그러니까 이 내용이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라, 범인에게는 일말의 동정도 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생각만 같아서는 아예 모든 고교입시에서 탈락시켜버려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제가 공감할 수 있었던 부분은 '간절함이 다르다'는 부분입니다. 이건 어느정도 이해가 가는 일입니다. 학생에게나, 출제 및 감독관에게나, 모두에게 말이죠. 사실 현실적으로 출제자들에게 학생들 만큼의 정성과 간절함을 가지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아니, 단언컨대 불가능입니다. 왜냐면 수험생에게 출제/감독관은 100명도 채 되지 않는 인원이지만 그들에게 경쟁률이 두 자릿수로 올라가기만 해도 수천, 수만명이 되어버리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역시 학생의 입장도 이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Y대 논술 보러 갔을 때 강당에서 판때기 놓고 논술 문제를 풀었던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부글부글.. 학교가 학생들(입시생)에게 얼마나 무성의하고 자기편의위주로 일을 처리하는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던 기회였습니다.


특히 이런 부분을 상징하는 인물이 '사카모토'인데, 실제로 학교에 이런 류의 교사가 얼마나 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해의 여지가 전혀 없는건 아니지만(생각해보면 응시자가 2000명만 되도 답안지가 2000개, 문제가 10개씩이라고 하면 20,000문항이니까) 그렇다고 이해를 해야하는 범주는 아닌 것이죠. '사카모토'가 그런 내용을 지적하기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인 것 마냥 굉장히 극단적으로 부정적이게 그려지는데, 이런 교사가 실재한다면, 솔직히 충분히 화낼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책 자체의 재미는 훌륭합니다. 꽤 두껍지만 흡입력이 대단합니다. 다만 초반에는 등장인물들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자꾸 시점이 변해서 굉장히 헷갈립니다. 별로 높진 않지만 일종의 진입장벽처럼.. 초반부만 잘 넘어가면 캐릭터가 금방 머리에 박혀서 쉽게 구분이 됩니다. 심지어 서술자 이름을 보지 않아도 아, 이건 누가 서술하는거구나 싶기까지. 


요즘은 이런 소설이 괜찮은 것 같습니다. 트렌드인가 싶기도 하고. 그러니까, 미스터리라고 본격 미스터리같은게 아니라, (조금 다르겠지만) 빙과라거나 <고교입시>처럼 일종의 '일상 추리물' 종류.. 이 책은 가벼운 마음으로도 조금 진지하게도 모두 재밌게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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