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원에서의 추리...대결이었을텐데?! :: 히가시노 게이고 - <백은의 잭>

백은의 잭 - 10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한성례 옮김/씨엘북스

히가시노 게이고, 가볍게 뽑아 들 수 있는 작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내 머릿속에 히가시노 게이고는, 말 그대로 '가볍게 뽑아들 수 있는 작가'다. 사회파 추리소설이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가져다 붙일 필요도 없다. 일각에서는 사회파 미스터리에 어정쩡하게 발을 담갔다고 하는 비판을 가하기도 하는데, 확실히 그의 작품들은 사회 문제를 지적하는 경향이 강하다. 굳이 사회문제가 아니더라도, 통상적으로 추리소설을 전개해나가지는 않는다. <사명과 영혼의 경계>에서는 의료, <플래티나 데이터>에서는 현대의 관리 통치, 이런 식이다. 그렇다면 소설에 무게가 있어야하는데, 왜 가벼울까. 그건, 본격적으로 파고든다거나, 그 쪽에 핀포인트를 맞춘다거나, 그런게 아니라서-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어찌보면 킬링타임에 가까운, 그런 소설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건 대개의 추리소설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사항으로서, 반전을 굉장히 즐겨 사용한다는 것도 있다. 그의 소설을 모두 접해본 것은 아니고 5권 남짓이었지만, 하나같이 결말은 '뒤집기'였다. 뒤집고, 또 뒤집는다. 반전에 반전을 넣기도 하고, 반전 이후에 숨겨진 내막이 있기도 하고. 이정도되면, 애초에 트릭같은 부분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명과 영혼의 경계>에서는 트릭에 기계 장치를 포함시킴으로서 일반인으로서는 추리해낼 수 없는 트릭을 만들어냈다. 이렇듯 트릭을 추측해내고 이런 결말을 향해 가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작가와 독자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을 히가시노 게이고는 단계째 스킵한다. 이게 반드시 단점만은 아닐 것이다.

반전이나 허탈했던
그런 의미에서 <백은의 잭>도 그런 3대 요소를 잘 챙겼다. 첫째, 사회파의 경향을 가질 것, 둘째, 반전을 가질 것, 셋째, 트릭 자체에 큰 관심을 주지 말 것. 이 소설에서는 어떻게 드러나냐면, 첫째, '환경 문제'를 다룬다. 둘째, 반전을 사용한다. 셋째, 트릭 자체에는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우선, 경고장의 내용이, 스키장이 환경을 파괴하고 있으니 그에 대한 위자료를 청구한다라는 식. 터무니없다는 것은 작가도 생각하고 있고, 작품 속의 주인공들이 말한다. 그저 명분일 뿐인 것이라고. 사실 환경 문제를 다루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고, 그보다는 개발 논리에 관한 것이라고 보는게 좋겠다. 대기업이 들어서거나 대형 토목공사 등이 시작되면, 분명히 어디선가 '망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예컨대 간척을 하면 어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대거 몰락하고, 그런 식이다. 이 소설도 그 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보는게 옳을 것이다. 스키장을 운영하는 쪽은 수익성을 제1의 요소로하여 개발에 착수한다. 그에 반해 지역 주민들은 자신들의 이익도 챙겨야 한다. 그러한 각자의 이익 추구가 서로 상충되는 경우,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그런 이익의 상충을 결탁으로 해결해낸다. 물론, 그것을 해결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사실 이러한 내용만 알고 봐도, 더이상 반전은 끝.

사실 반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중간 쯤에 가면 사장의 미묘한 태도 변화가 드러나는데, 여기쯤 되서야 "아, 저거 뭔가 있구나" 싶은 정도였다. 진범과 다른 의미에서의 또다른 진범이라니, 예측할 수 있었을리가 없다.

그렇다고 감탄스러우냐하면, 그건 절대 아니다. 말 그대로 반전이나 허탈했던 결말이었다. 무엇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그동안 봐왔던 사람이라면, 미리 깔아놨던 포석(가짜 범인을 내세우는 것 등)이 반전을 위한 것이라는걸 눈치채기 충분했고, 곧 그 사람들은 절대 범인이 아닐 거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반전이라는 부분에서만 봐도 절반뿐인 반전이었던 셈. 그러나 그보다 큰 문제는 이야기의 타이트했던 긴장감을 너무 허망하게 놓아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장황한 추리 따위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영화로 치자면 포석은 신나게 깔아놓고 결말을 10분으로 처리한다는, 그런 느낌(그러고보니 이 작품, 일본에서 영상화 결정이라는데, 이것도 걱정이 아닐 수 없다)이라고나 할까.

읽어볼만하지만, 추리소설이라는 기대는 버리시라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평작 이상이다. 대작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수작은 꽤 많고, 평작 이하의 퀄리티인 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더불어 굉장히 작품이 나오는 빈도가 짧은 편이다. 인스턴트하다는 느낌이랄까? 빠르게 작품을 써내는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기왕 같은 퀄리티라면 속필이 좋겠지만, 작품의 주기 자체가 짧다는 것은 구상 기간도 그만큼 짧다는 것이니까. 구상이 빠른 것인지, 구상을 대충하는 것인지, 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다보니 작가의 성향이나 경향 파악이 굉장히 쉽다. 워낙 많은 소설을 쓰다보니 공통 분모를 추출해낼 소스가 많은 셈이다. 그러다보니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의 정형화된 소설 전개 패턴을 알게 되버린다. 그러고나면, 솔직히 추리소설로서의 재미는 확실히 덜하다.

평가하건대, 읽어볼만은 하다. 아니, 충분히 읽을만한 소설이다. 소설로서는 충분한 퀄리티를 챙겼다. 재미는 있으니까. 묘사도 좋고. 스키에 관심이 없었던 내가 스키나 보드를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스키장 풍경은 잘 묘사되고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야 원래 주어진 환경을 잘 이용하던 사람이 아니던가. 그게 병원이든, 연구소든, 경찰이든, 아니면 이런 스키장이든간에. 그러나, 사실 내가 처음으로 읽었던 그의 소설- <용의자 X의 헌신>때부터 항상 가지고 있던 생각인데, 추리소설이라는 기대는 버려야한다. 그럼, 충분히 재밌게 즐길 수 있으리라.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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