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0. 들어가며

   황정은이라는 이름이 반갑다. 고등학교 때, 백의 그림자를 읽고 서평을 쓸 기회가 있었다. 모 독후감대회에, 고등학생이라는 신분으로 제출했던 작품. 블로그에도 짤막하게 서평을 썼던 기억이 난다. 당시 대회에 나가는 글은 훨씬 더 정성을 들였고, 몇 번을 거듭해서 다듬었다. 내가 처음 읽은 황정은의 책이었고, 내가 독서에 맛을 들이게 되는 여러가지 계기 중 하나가 되어주기도 했다. 물론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황정은이라는 이름은 나의 독서력에 꽤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름이다.

 

   그렇지만 또 다시 이야기하자면, 황정은의 책은 어렵다. 최근 오랫동안 글을 읽지 않아 텍스트가 눈에 잘 안들어오는 문제가 있기도 하지만, 그런 점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황정은의 책은 어떻게 보면 난해하기까지 하다. 백의 그림자는 조금 덜했는데, 그 이후에 읽었던 '야만적인 앨리스씨'나 '파씨의 입문'은 훨씬 더 어려웠다.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책은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이번 작품은 백의 그림자에 가깝다. 훨씬 더 잘 읽히고, 훨씬 흥미롭다. 무슨 내용인지 따라가기 쉽다. 계속해보겠습니다, 저도 한 번, 황정은 작가님의 소설 읽기, 계속해보겠습니다, 같은 알 수 없는 투지를 불태워주는 책이다. 한마디로, 훨씬 더 캐주얼해졌다.



1. 그녀의 글, 황량한 텍스트

   황정은, 이라는 이름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는 황량함이다. 그녀의 감성이나 글에 묻어나는 심상이 황량한 것인지, 그의 작법이 황량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결핍된 인간, 결핍된 사회를 거울처럼 드러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소설에서는 왠지 모르겠지만 회색과 황토색의 이미지가 묻어난다. 그녀의 글은, 그래서인지 황폐하거나 황량하거나, 그런 정도의 느낌이다. 그녀의 텍스트는 글자와 온점, 쉼표 이외의 문장부호나 여타의 기호를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 질문에도 물음표가 붙는 법이 없고, 말하는 데에도 따옴표가 붙는 법이 없다.

 

   처음, 백의 그림자를 쓸 때 그런 표현을 썼었다. 따옴표를 쓰지 않는 방법은 굉장히 인상깊고, 그것은 마치 마음 소에서 울리는 소리인 것 같다고. 여전히 그런 이미지에는 변화가 없다. 따옴표가 없는 것은 설명이나 심리와 말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말이 말같지 않다. 마치 텔레파시를 통해 이야기를 엿듣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마치 머릿속에서 말이 울려오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렇지만 이런 작법은 소설의 템포를 은근히 숨차게 만든다. 따옴표와 '대사'는 줄글에 있어서 일종의 쉼표 역할을 한다. 여러가지 상황이나 서술의 흐름 속에서 따옴표는 그 흐름을 적절히 끊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황정은의 소설은 그런 게 없다. 그녀의 소설 속에서 대사와 심리와 묘사와 서술의 경계는 지나칠 정도로 흐릿하다. 덕분에 소설을 읽는 독자는 굉장히 숨이 찬다. 그래서인지 소설의 황량한 느낌은 더더욱 강해진다.


   그녀의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초점잃은 카메라가 세상을 담아내고 있는듯한 기분에 휩싸인다. 묘사나 문장부호의 의도적인 생략과 절제를 통해서 상상력이라는 우리의 카메라는 갈 곳을 잃고 여기저기를 헤맨다. 그래서 오히려 소설은 더욱 황량하다. 우리의 손에도, 눈에도 잡히는게 없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주는 황량함은 그래서 실제보다 훨씬 배가된다.



2. 소라, 나나, 나기, 그리고 다시 나나

   중심이 되는 등장인물은 네 명이다. 소라, 나나, 나기, 애자. 이들에게는 여느 황정은의 소설처럼, 사람같지 않은 이름이 붙었다. 어딘가,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어, 라는 말을 들으면 그런게 어딨어, 라고 대답해주고 싶은 이름들이다. 황정은의 소설에서는 항상 그랬다. 이러한 이름은 등장인물에게 이름을 붙여주면서도, 그들에게 익명성을 부여한다. 옛날에 어느 소설에선가, 등장인물을 A는 B는 C는, 이렇게 불렀던 적이 있는 것 같다. 바로 그런 느낌이다. 너무 이름같지 않은 이름이라, 등장인물들은 미묘한 익명성을 가지고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세 명 모두에게 고르게 초점을 나누어주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이야기가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나나. 독자에게 유일하게 존댓말로 말을 건네는 나나. 등장인물들의 관점 차이는 이 소설의 주요한 부분이 되는데, 같은 사건에 대해서 양쪽의 인물의 말을 듣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사건의 양면을 함께 보여주는 즐거움이 있다.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소라와 나나, 나나와 나기, 나기와 소라. 이들은 같은 일을 겪으면서 서로가 서로를 추측하고, 서로가 서로를 넘겨 짚는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렇게 넘겨 짚었던 일이 사실은 그렇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그런 일련의 사건의 연속이다.


   이 소설은 뭘까. 소설은 잔잔하고 담담하고 격렬하고 뜨겁도 차갑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종류의 것이다. 나나는 나기를 좋아했고, 나기는 한 남자아이를 좋아했고, 소라는 그런 나나를 걱정했고.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그녀들, 또는 그의 모습은 굉장히 비정상적이지만, 사이 사이 단순히 ‘~했다’라면서 묘사 정도로 그치고 있는 부분을 살펴보면 그 나이대의 평범한 여자아이, 또는 남자아이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즉, 소라나 나나, 나기의 모습은 실제로 작가가 설정한 것에 비해서 훨씬 더 이질적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소리다. 


   그녀들은 소시민을 표상하고 있다. 이야기의 중심은 나나의 혼전 임신이다. 그녀가 어떻게 혼전 임신을 하고, 그녀가 어떻게 결혼을 포기하는가. 그리고 그녀의 주변에 서있는 사람들에겐 어떤 일이 있었는가. 소설은 굉장히 복잡하고, 여기저기 배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은근히 체계적으로 그녀의 주변을 파고 든다. 소라는, 나나는, 나기는, 어떻게 자랐고 어떤 일을 겪었고 무엇을 먹었고 누구를 만났고 어떻게 자랐나. 얄팍한 소설 한 권에는 세 사람의 인생이 모두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만 같다.


   그렇다. 소설은 굉장히 얇다. 다해서 200쪽이 되려나 어쩌려나 싶었는데 200쪽은 된다. 그런데 실제로 이야기는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다. 소설 속에서 묘사는 배제되지만, 감정 묘사에는 투철하다. 그녀들의, 그의 감정은 상황 묘사라는 부차적인 수단을 통하지 않고 곧장 독자에게로 파고든다. 그래서인지 소설은 술술 읽히지는 않는다. 읽는다, 라는 행위의 부담이 매우 크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휩쓸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렇지만 왠지 한 번은 꼭 읽어야할 것만 같은 소설이다.


   그나저나...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여기저기 조금씩 들쑤시고 다녀보니, 황정은이라는 작가도 어느새 메이저 작가의 대열에 올라서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원년 팬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우연찮은 기회로 늦지 않게 접한 작가였는데, 아직도 내 주변에는 그게 누구냐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 아쉬운데.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작가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반, 그런 작가가 되어가는 것이 아쉽다는 이기적인 마음이 반. 굉장히 마이너한 취향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이미지 맵

    서평/소설 다른 글

    이전 글

    다음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