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그리고 인싸와 아싸

#1.

   세상에 사과해야할 일이 너무 많아졌다. 기록의 사회가 된 탓이다. 디지털 문명, 소셜미디어의 확산 아래에서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 일상의 기록에 소홀해졌다. 일기를 쓰는 사람은 확연히 줄었고, 오래 기록될만한 메모도 옛날에 비하면 거의 남기지 않는 것 같다. 디지털 자료로 저장된 메모는 쉽게 소실되고, 사용가치를 잃으면 사용자에 의해 지워진다. 그러나 소셜미디어의 영향 하에서, 우리는 그 어떤 시대보다도 더욱 나의 일상과 생각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시대가 된 것도 사실이다. 

 

   말 한 마디, 글 한 줄의 파급력에서도 확연히 차이가 난다. 여전히 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이제 한 번 뱉어낸 말의 파급력은 옛날에 비할바가 아니다. 사과를 할 일이 늘어난 만큼, 사과의 모습도 가지각색이다. 공직자들, 혹은 공직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어느정도의 위치에 있는 이들은 소위 "책임을 통감하며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사람들도 있는가하면, 또 누군가는 "책임을 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라며 자리를 지킨다. 누군가는 '사죄문'이라는 이름을 달고 주절주절, 제가 이랬는데, 사실은 이런건데, 얘는 이랬는데, 하면서 이야기를 늘어놓는가 하면, 모 기업의 총수격인 사람은 나라를 뒤집었던 질병 앞에서 깔끔하고 명료한 사과문을 게시하며 '사과문의 정석'이란 소릴 듣기도 한다.

 

   이런 여러가지 사과의 모습 때문인지, 때로는 사과를 한 것이 역효과를 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비록 완전하지 못한 사과문일지라도, 너무나도 흔해져버린 사과문일지라도, 자신의 잘못 앞에서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옳은 일이며, 용기있는 일이다. 그렇다. 어찌되었든, 대부분의 경우에 '안하느니만 못한' 사과는 거의 없다.

 

#2.

   얼마전에, 학내 커뮤니티에서 굉장히 자극적인 글이 올라왔다. 우리 학교의 경우, 공대를 제외한 나머지 단과대(정확히는 학부)는 다른 학교의 '반' 개념으로서 '섹션(section)'이라는 소단위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 학교의 규모가 비록 크지는 않지만, 학부 하나의 인원은 상당한데다 과단위 선발이 아닌 학부단위 선발을 하는 과가 절대 다수이기 때문에 새내기들의 학교 생활을 돕고, 과별 행사 등을 원만히 진행하기 위하여 운영하고 있는 제도다. 학내 커뮤니티에 올라온 내용은 이 '섹션' 단위의 MT에서 일부 선배들이 새내기들에게 모욕감, 불쾌감을 줄 수 있는 행위를 강요했다는 일종의 고발이었다. 학교는 당연히 발칵 뒤집혔다.

 

   해당 단과대 학생회의 대응은 방식으로나 시기적으로나 굉장히 적절했다고 본다. 동 학내 커뮤니티는 아니지만 페이스북의 그룹을 통해 운영되고 있는 또 다른 커뮤니티에 사과문을 게재하였다. 명의는 해당 단과대 부학생회장이자 당해연도 새내기맞이사업단장이었던 학생. 그 때까지만 해도, 심각하기는 하지만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정도에서 원만히 끝날 문제였다. 비록 10,000명이 넘는 규모의 학내 커뮤니티이지만 선배와 후배, 동기와 동기 간의 관계를 바탕으로 한 커뮤니티인 이상 그 이상으로 고발이 이어지기란 쉽지 않을 터였다.

 

   문제에 불을 지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해당 단과대의 졸업생들이었다. 정말 간단한 문제제기였다. 원문을 그대로 옮기자면,

 

우선 앞서 올리신 글에 상당한 유감을 표합니다. 제대로 정황 파악을 하고 올리신 글인지 의문이 드네요. 익게에 올라온 글 하나로 하나의 섹션을 전통적인 비상식적 집단으로 규정지으셨네요. 해당 섹션을 대신해 공개 사과까지 하시구요.

 

   그 아래 이어진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해당 내용에서 고발한 몇몇의 내용은 공식적인 프로그램이지만 20년이 넘는 전통있는 종류의 것이며, 또 일부는 전통은 아니지만 일부 학생들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단과대 단위의 사과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 일부 학생들이 불쾌감을 느꼈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공개적으로 지탄받아야할 행위인지 모르겠으며, 그것도 단과대 단위의 행사가 아닌 섹션 단위의 행사에 대해 왜 단과대 부학생회장이 사과하느냐는 내용이었다.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일부 있었는데, 이런 의견이었다. 역시 동 단과대 졸업생이 남긴 글이다.

 

이건 그냥 무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불만가진 한 개인이 악의적으로 올렸다고 밖엔 볼 수가 없네요.. 정녕 지금 우리시대 대학이란 곳은 이 정도 대물림을 젊은 청춘들의 한바탕 장난으로 이해할 수 없는건가요? 이 시대의 이십대 초반 아이들은 자신이 받아들이기 싫은 부분은 절때 타협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인터넷 공간에 불쾌한 글을 싸지르는 세대인지 다시 한번 알게되어 서글퍼 지기까지 하네요.. 이렇게 마녀사냥과 악의적 글로 좋은 추억이 난도질을 당하고 있는 걸 보고 있으니 기분이 많이 안좋네요. 남을 나무라기 전에 자기들도 한번은 돌아봤음 합니다..

#3.

   해당 섹션 행사가 전문적인 기획인에 의해 제대로 검토되지 않은 행사이기 때문에 여러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은 인지하고 있고, 아마도 이러한 논란이 생긴 데에는 그러한 이유가 클 터이다. 사실 섹션행사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대개의 행사가 바로 윗학번에 의해 주도되는 경우가 많고, 새내기 입장에서야 높은 선배라고 느끼지만 그래봤자 새내기보다 대학생활 1~2년 정도 더한 사람들일 뿐이다. 그들의 대부분 역시 사회경험이 전무한 경우가 많고, 일부 단과대는 단과대 단위에서 양성평등교육 등을 거치면서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가지만, 절대 다수의 단과대는 그렇지 못하다. 그 결과, 올해초 전교 단위의 OR에서 모 단과대가 붙인 '방칙'이 성적 불쾌감을 줄 수 있는 내용이라는 고발에 연초가 시끌벅적했던 일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이러한 사태를 보면서 안타까웠던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해당 단과대 졸업생'이라며 저런 말을 던지는 사람들의 무심함이었다. 이들의 논리는 철저하게 가해자의 입장에 서있다. 심지어 두 번째 의견은 그러한 적개심을 '무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불만가진 한 개인'이라는 표현으로 직설적으로 드러내기까지 한다. 이들의 말은 사회적 이슈에 유명인들이 내놓는 구태의연한 사과문이나 의견과 닮았다. 일부 인원들이 한 문제가 왜 단과대 전체의 문제가 되냐는, 문제를 개인적 일탈로 몰고가는 부분이나, 오랜 전통이 있는 행사에 왜 태클을 거냐는 (솔직히 말하자면 읽는 사람을 당황케 하는) 논리다. 섹션 단위 행사에 있어 왜 단과대 학생회에서 먼저 사과를 하냐는 말은 어느 정도 논란의 여지는 있겠으나, 어쨌든 단과대 학생회는 섹션의 위에 있고, 해당 사건의 책임자라고 한다면 당연히 단과대 학생회가 되는 것이 옳은 상황이었다. 우리가 이러한 논리에 익숙하지 못한 것은, 이러한 논리를 우리가 겪어보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예컨대 모 사단에서 사고가 난걸 국방부가 사과했더니 사단장이 "거 국방부가 왜 나서쇼?" 하는 셈이다. 이러한 논리가 성립한다면 지금까지 여러 학교에서 논란이 될 때마다 학교 명의로 나왔던 숱한 사과문들은 모두 '오지랖'에 불과한 것이 된다.

 

   섹션 행사, 개중에서도 MT는 이름 그대로 구성원들의 단합을 다지는 자리다. 그러나 대학사회는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학교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처음부터 이러한 섹션 단위, 과 단위 행사에 참여할 생각이 없을 수도 있다. 또 누군가는 섹션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 섹션에 발을 담그지 않을 수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OR이나 MT는 구성원들의 단합을 다지는 자리이면서, 동시에 이러한 사람들을 걸러내는 역할을 한다. 뒤의 역할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부여한 기능이 아니다. 단합된 전체 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이, OR이나 MT에서 그러한 전체와의 거리감을 느끼면서 그 전체와 멀어지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다. 이러한 일로 누군가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고, 또 물을 생각도 없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이들에 대해 "무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불만가진 한 개인"이라는 적개심 가득한 표현으로 매도하고, '젊은 청춘들의 한바탕 장난'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아픔을 덮으려는 논리는 보고 있는 사람을 아연실색케한다. 동시에 인싸보단 아싸에 한없이 가까웠던 한 개인으로서 그들이 아싸를 어떠한 시선으로 어떻게 바라봐왔는지를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표현인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하기까지 하다. 그의 글에서는 섹션 문화에 동화되지 못한 이들에 대한 강한 적개심이 드러나는데, 이는 곧장 내부고발자에 대한 혐오와 분노로 이어지는듯 하다. "타협하지 않는다. 무책임하게 인터넷 공간에 불쾌한 글을 싸지른다. 난도질한다." 이러한 표현 하나 하나에서 섬뜩할 정도의 혐오감, 불쾌감이 느껴지는 듯 하다.

 

   이번 사태에 안타까운 점은, 정말로 조용히 잘 끝날 수 있는 사태를, 해당 과의 몇몇 졸업생들이 완전히 뒤집어 엎어버렸다는 데에 있다. 그들은 저런 글을 쓰고 나서도 그치지 않았다. 분란을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라는 내용을 담은 글에서도 그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지금까지 학내 커뮤니티에서 여러가지 재학생들의 논란에 졸업생들의 역할은 일종의 소방관이었다. 분란을 잠재우고, 저 때도 이랬는데, 사실은 이래요, 하면서, 적절한 선을 지키면서 후배들의 길잡이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반대로, 재학생들의 문제를 재학생들이 잘 헤쳐나가고 있는 가운데에, 졸업생들이 들어와 분위기를 완전히 엎어버렸다. 그러한 점에서 더더욱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느 학교, 어느 조직이나 주류 그룹에 합류하는 사람과 합류하지 않는 사람은 있다. 전자를 인싸, 후자를 아싸라 부른다. 우리 나라도 외향적인 사람을 선호하며, 당연하겠지만 조직 사회에 두루 두루 잘 순화되는 사람을 바라다보니 전자를 후자보다 훨씬 선호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대학 사회의 절대 다수는 적어도 과 안에서는 인싸로 남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들 사이에 서로 불편한 감정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애착이 가지도 않는 조직에 자꾸 불러내는 인싸들을 아싸는 아니꼽게 볼 수 밖에 없고, 조직이 굴러가는데 자꾸 빠지고 방해되는 아싸를 인싸도 좋게만 바라볼 수는 없다. 그래서인지 같은 학내에서 서로 이렇게 칼을 꺼내드는 일은 보기 드문 현상이 아니다. 한 섹션 MT에서 일어났던 일종의 '사고'가, 잘 수습되는듯 하다가 갑자기 이러한 논란과 싸움의 장이 된 데에는 그런 복잡한 뒷배경이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 문제에 있어서 '일부 부적응자'나 '일부 불쾌감을 느끼는 학생'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은 그다지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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