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 유랑화사

 

 

0.

   노블엔진팝 레이블 이야기부터 하자면, 이게 조금 묘한 레이블이다. 라이트노블과 일반 소설의 경계선 쯤에 있는 소설인데, 일반적인 대중소설에서 장편과 중편 사이 쯤이 되는 정도로 "경장편"이라는 걸 밀었던 적이 있는데 조금은 그런 느낌이다. 노블엔진팝이라는 레이블을 달고 나온 소설로는 이번이 3번째 읽는 것 같은데, 한가지 확실한건 어느정도 믿고 볼 수 있는 레이블이 되었다는거다. 나름 자리잡기도 성공한 것 같다.

 

1.

   유랑화사는 옴니버스 형식으로, 화술사(畵術師)와 그를 따라다니는 꼬마 여우 이야기로 배경은 대충 판단하건대 조선시대 언저리인 것으로 보인다(이쪽은 지식이 없어서 시대적 배경은 정확하지 않다). 신선하다면 신선하고 식상하다면 식상한 종류의 이야기로, 유능한 유랑인과 그를 따라다니는 어린 아이가 여러가지 기묘한 이야기를 듣고 해치운다는 조금은 전형적인 이야기다. 다만 그 유능한 사람이 그림을 그려 해결한다는 점에서 다른 이야기와 확실히 구분되는 부분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배경을 우리나라의 과거로 설정함으로써 그동안 서양식·일본식 기담에 익숙해진 독자들에게는 신선한 재미가 있다.

 

2.

   이야기는 여의상자, 웃는 모란화, 월궁선녀, 목각인형 등 네 편으로 구성되어있다. 저자가 후기에서 밝히듯이, 원전이 있는 소설들도 많고 아무래도 조선시대의 이야기를 가져오다보니 교훈적인 이야기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어린 시절 포송령의 『요재지이』를 매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여우라는 동물을 좋아하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습니다. 한참 나중에, 도서관에서 우연히 임방이라는 조선 후기 문인이 엮은 야담집 『천예록』을 발견하고, 우리나라에도 다른 나라 못지않게 신기한 이야기들이 많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찾아 읽은 온갖 것들이 이 기묘한 화사와 여우 소녀가 등장하는 이야기의 뿌리가 된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이야기 안에 등장하는 어떤 것들은 원전이 있습니다. 반드시 원전을 그대로 따른 것은 아니나, 참고삼아 밝혀두겠습니다. (저자후기 중)

 

2-1. 여의상자

   여의상자는 마을의 한 부호가 가진 여의상자에 관한 이야기다. 상자에 여우를 잡아 넣으면, 그 여우가 신통력을 발휘해서 큰 부를 가져다준다는 것. 전형적인 권선...은 아니고 징악 적인 이야기다. 여우 입장에서 본다면 결국 아무런 죄없는 여우가 풀려났으니 권선이라고 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저자 후기를 보면 홍백탈이나 삼시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잘 밝혀두었으니 관심이 있다면 읽어봐도 좋다.

 

2-2. 웃는 모란화

   기생인 모란화가 죽고 나서 화염귀로 등장한다는 이야기. 이 소설에는 "알고 보니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하는, 뒷배경에 관한 반전이 많은데 이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모란화가 정말로 신랑을 사랑했을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가 롤플레잉 게임을 하듯이 신랑을 키우는 재미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모란화가 신랑을 싫어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 어쨌든 그녀 만의 방식으로 사랑했고 모두 그를 위해 했던 일이라는 것이다. 드디어 그 결실을 보기 직전에 죽어버린 모란화의 비극. 해피엔딩도 배드엔딩도 아닌것이 조금 씁쓸한 맛이 남는 이야기.

 

2-3. 월궁선녀

   개인적으로 꼽는, 네 편중 베스트. 아무런 감정이 없을 월인족이 내려와 가족을 이루고 자신을 억제하지 못할 것이 걱정되어 스스롤 밧줄로 묶고 나서 죽어간다는 애처로운 이야기. 결국 화사도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라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상투적이고 전형적인, 모성애는 대단했다(또는 가족애는 대단했다) 정도로 풀이될 수 있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야기는 굉장히 수상하고, 미묘하게 아름답다.

 

2-4. 목각인형

   한 마을에서 망나니처럼 살고 있는 아이를 한 목각인형이 나타나서 자꾸만 괴롭힌다는 이야기. '월궁선녀'와 마찬가지로 모성애는 대단했다는 이야기 정도로 풀이될 수 있으려나. "웃는 모란화"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이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달달한 맛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없다.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이 차고 넘치는 이야기들. 목각인형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모성애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나오지만, 결과적으로 우리가 보게되는 모성애는 조금 다른 모양이다. 이 소설은 추리소설마냥 반전을 눈치챌 수 있는 장치가 여기저기 있으니 찾아보면서 읽어봐도 좋다. 물론 막바지에 화사가 깔끔하게 정리해주니 나처럼 생각없이 읽어도 좋고.

 

3.

   이 소설이 반가운 것은, 우리나라 고전 민담의 부활이라는 점이다. 일본 서브컬쳐계를 보면 비교적 그런 노력이나 시도가 자주 보인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문화의 말살의 결과물인지, 아니면 그저 관심이 없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여러 매력적인 이야기를 놔두고 현대적으로 재구성되는 이야기는 적은 편이다. 아무래도 매력적인 소재인 덕분에 조금씩 시도되고는 있으나 그 양이 많지 않다. 특히 매력적인 기담이나 야사가 많은데 그러한 이야기가 재발굴되지 않는다는 점은 항상 아쉽다. 유랑화사는 그런 아쉬움을 비교적 깔끔하게 해결해주는 책이다. 기회가 되면 저자가 말한 천예록도 한 번쯤 읽어보면 좋을 것 같은데.

 

   옴니버스 식의 구조이지만 전체적인 이야기는 한 방향을 향하게 될 것 같은데, 아직 그 방향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막바지에 화사와 꼬마 여우가 같이 돌아다니는 것은 확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아마도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화사는 왜 그렇게 떠돌고 있는가에 관한 이야기와 꼬마 여우의 엄마 찾기에 관한 이야기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소설의 장르적 방향은 신파극인데, 인터넷을 조금 찾아보니 3권부터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간다고 하니, 3권 쯤 되면 본격적인 이야기의 큰 줄기를 타고 갈지도 모르겠다.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이미지 맵

    서평/소설 다른 글

    이전 글

    다음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