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네자와 호노부, 빙과

 

 

1.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시리즈를 일단 정발된 데가지 다 완독하고 나서, 다음 책으로 찾아 든게 이 고전부 시리즈, '빙과'다. 사실 빙과라고 한다면 이미 애니메이션으로 한 번 본 작품인데, 사실 요즘은 미디어믹스가 없는 제품이 없어서 아예 새로운 작품을 찾기란 쉽지않다. 오히려 미디어믹스가 될만큼 성공한 작품이라는 뜻도 되고, 부담없이 고를 수 잇는 작품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왠지 미디어믹스가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낟. 미디어믹스로 먼저 작품을 접하고 나서 책을 읽으면 대개 더 좋지만, 종종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의 내용에 사로잡혀서 책을 읽다가 지치는 경우도 있다. 특히 너무 많은 권수를 너무 짧은 이야기에 몰아 담은 작품들이 그렇다. 어정쩡하게 이야기만 가르쳐주고, 읽다보면 새로운 점도 발견하게 되지만 읽어도 읽어도 아는 이야기가 나오면 사람은 언젠가 지치기 마련이다. 내게는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시리즈가 그랬다. 책을 보기 전이 드라마에 대한 만족도도 더 높았다. 읽으면 읽을 수록 드라마의 부실했던 점이 눈에 띄고, 책은 새로운 재미를 가져다줬지만 이미 아는 내용이 4권까지 이어지니 지칠 수 밖에 없었다. 아마도 요즘 내 독서에 대한 집중도가 현저하게 떨어졌다는 것도 일조하겠지만.

 

2.

   고전부 시리즈는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시리즈와 한 계통으로 일컬어진다. 예컨대 '일상 추리물'이라는 소리다. 그런데 그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시리즈에 비해 한 권뿐이지만 내가 만나본 고전부 시리즈는 훨씬 가볍고, 진득하다. 아무래도 옴니버스 구조를 가지는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과는 다르게 하나의 이야기를 쫓아가는 구조이다보니(물론 각권의 입장에서 보면 옴니버스이겠으나) 이야기가 훨씬 안정감이 있고 몰입도도 좋은 편이다. 요컨대, 한 번에 몰아서 보기에는 비블리아 시리즈보다는 훨씬 낫다는 이야기다. 그와는 별개로, 비블리아 시리즈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을 빌리자면 이 책은 '장정'이 참 예쁘게 잘 나온 책이다. 일본 원판은 잘 모르겠으나 엘릭시르에서 나온 <고전부 시리즈>는 내가 원하는 책의 형태를 잘 갖추고 있다. 탄탄한 양장 제본과 시리즈물 다운 장정의 일관성, 적당히 얇고 적당히 부드러운 종이, 적당한 사이즈, 적당한 무게, 심플하고 세련된 디자인. 요 그랜에 내가 만나본 그 어떤 책보다도 만족스러운 장정이다.

 

3.

   책의 플롯은 매우, 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될 정도로 단순하다. 여자 주인공 지탄다, 의 삼촌 세키타니 준과 그가 남긴 문집 <빙과>의 비밀을 찾아나서는 고전부원들의 이야기. 굳이 광고 카피처럼 말하자면 "그 안에 담긴 비밀은 도대체 무엇인가?!" 정도. 일상추리물다운 주제, 일상추리물 다운 전개가 상당히 흡족스럽다. 흥미로운 점은 세키타니 준을 제대로 된 영웅으로 그리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자세한 내용은 스포일러가 되겠으나, 어쨌든 영웅은 행복할 수가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성질이 전혀 다르긴 하지만 우리 사회 속에서 수많은 공익제보자들이 처한 상황과도 비슷하다. 잣긴이 희생한 것이 아니고, 희생당한 것이라면, 그것은 또 어떤 의미에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다.

 

4.

   학교 축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 서브컬쳐물을 보다 보면 자주 하는 생각인데, 작품 속에서만인지 실제 일본의 고등학교 분위기가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축제가 잘 되어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이 이야기는 내가 블로그에서도 자주 했던 이야기인 것 같은데 우리나라의, 일년에 학사 일정에 포함되어있으니까 어쨌든 하기는 한다, 는 느낌이 아니라 뭔가 훨씬 본격적이다. 거기에는 동아리('특활부')가 탄탄하게 잘 되어있다는 것도 일조할 것이다. 새삼 내 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고등학교 생활을 한 단어로 줄이자면 단연 입시였다. 두 단어로 늘리자면 입시와 야구. 세 단어로 늘리자면 입시와 야구, 그리고 책이었다. 그런 느낌에 맞게 나는 동아리를 하나 하기는 했었는데, '늘품'이라는 이름의 문학토론동아리였다. 물론 내가 자발적으로 시작한 동아리고 애초에 동아리 1기이자 기장이 나이기도 하였으니 나름 자발적으로 잘 활동한 동아리였다고는 하겠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우리 동아리는 흔히 말하는 '입학사정관제 대비 동아리'였다. 믿을 수 없겠지만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그런 표현을 썼다. 학교 홈페이지에 우리 동아리가 소개되는 란이 '입학사정관제 대비 동아리'였다. 애초에 시작도 그랬다. 우리 학교는 꽤 역사깊은 입시학교다. 입시학교라는 표현이 웃긴데(아무래도 우리나라에는 입시에 신경쓰지 않는 인문계 고등학교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 같으니 말이다) 굳이 말하자면 그렇다는 소리다. 요즘의 표현을 빌리지만 '지역 거점 고등학교'정도? 비평준화 시절 우리 지역의 간판 학교였고, 나름 입시 실적도 좋아서(사실은 광주일고가 평준화되고나서 그 타이틀을 물려받은 것이지 않나 싶기도 하지만) 서울에서도 입시계에서는 아는 사람이 드문 드문 있는 학교다.

 

   그런 학교가 평준화가 되고, 우리가 3~4년차 정도 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1학년까지는 옛날같은 분위기 속에서 정시에 올인하던 학교가 2학년 쯤부터 갑자기 시작된 입학사정관제 열풍에 어설프게 대비하면서 학생들에게 동아리를 권했다. 일단 말은 권한 것이고 앞에 한 글자를 덧붙이자면 강권했다. 사실 나는 그런 분위기에 별로 거부감이 없었고 실제로 동아리 활동도 즐겁게 했지만, 애초에 그렇게 시작한 동아리였고 구성원도 전원 다 심화반 출신이었을 정도였으니 어떤 식으로 활동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우리끼리 즐겁게 활동한 것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2학년 때는 거의 전무하다 싶을 정도였다. 웃기게도 3학년 때가 가장 즐겁게 활동하던 때였는데(물론 이 때문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정시는 와장창 망했다...), 그런 우리에게 축제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애초에 축제는 수능이 끝난 고3들을 위해 수능이 끝나고 나서 마련된 자리였고, 역설적이게도 정작 3학년은 자리를 지킬 필요도 없는 자리였다. 내가 경험한 고등학교 3번의 축제는 대개 그렇게 무미건조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비슷한 '고전부'(일종의 문예부가 아닌가?)에서 문집까지 낸 소설 속의 주인공은 아직도 하염없이 부럽기만 하다.

 

5.

   어쨌든 요즘 드는 생각. 거창하게 책은 필요 없으니, 이렇다 싶은 집단(동인집단이어도 좋고, 어딘가의 필진이어도 좋고) 하나에 끼어들어서 간행되는 무언가에 내 글을 실어보고 싶다.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도 요즘 나는 글을 잘 쓰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나에게 왠지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단어들이다. 필진, 문집, 문예부, 그 모든 것들이.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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