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베 미유키, 솔로몬의 위증 1

1.

 옴니버스도 아니고 이렇게 대놓고 1, 2, 3권을 매겨서 나온 책을 책마다 서평을 써본 기억은 없다. 내가 편마다 서평을 쓰는 경우는 대개가 신간을 따라잡으면서 읽고 있는 경우고, 스토리가 이어지는 소설의 서평은 소설의 끝을 보고 쓰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그러니까, 내 서평은 책 단위가 아니고 이야기 단위였단 소리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단편소설집의 이야기를 따로 따로 서평을 써 올리는 정성을 들여본 적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소설에서 이렇게 서평을 남기는 이유는 이 소설이 너무나도 길기 때문이다. 그다지 호흡이 가쁘게 진행되는 편은 아니고(물론 추리소설이다보니 어느 정도의 페이스는 있지만) 일반적인 단행본 한 권 정도라면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정도의 호흡을 가지고 있지만, 워낙에 그 길이가 길다보니 시작하기도 전에 숨이 가빠졌다.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있으니 언제 갑자기 그 호흡을 끊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래서 굳이 이번 이야기는 세 개의 서평을 모두 나누어보기로 했다. 


2.

 바로 직전의 서평에서(미야베 미유키, 마술은 속삭인다) 그녀의 책을 많이 읽어본적이 없음을 고백한 바 있다. 그래서 기왕 삘받은 김에 스트레이트로 달려보기로 했다. 그 첫 번째가 이 소설, 솔로몬의 위증이다. 한 작가의 소설은 그 작가 특유의 색채가 있고, 그래서 좋은 것이지만 그래서 또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고, 독자 또한 한 작가의 책을 몰아서  보다보면 비슷비슷한 전개, 작가만의 스타일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그 작가를 떠나는 경우가 많다. 뭐, 이제 세 권째를 읽고 있으면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미야베 미유키는 그렇지는 않다. 그녀의 대표작이라고 한다면 역시 모방범과 화차일테고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솔로몬의 위증을 읽어보니 긴 분량의 소설을 잘 소화해내는 것 같다. 역시 유명한 소설, 유명한 작가에게는 이유가 있는 것일까.


3. 

 전에 읽었던 마술은 속삭인다가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대우받고 있는 모양인데 개인적인 평으로는 솔로몬의 위증이(적어도 1권까지는) 훨씬 낫다. 분량이 거의 6배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도. 현재는 그 1/3만을 읽었지만, 어쨌든 '마술은 속삭인다'보다 훨씬 흡인력있고 매력적인 이야기다. 그녀의 이야기는 대개 잔인한 종류의 것이라 매력적이라고 부르기 조금 뭐한 부분이 없지않아 있지만.


 전작이었던 마술이 속삭인다에 새롭고 참신한 소재의 즐거움이 있었다고 한다면, 이번 소설은 비교적 정통 추리소설의 그것의 재미가 있다. 마술은 속삭인다에서처럼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했을법한 소재를 갑자기 끌고 들어오지도 않았다. 적어도 1권까지는 말이지. 그러고보니 서평이란건 항상 이야기, 트릭을 모두 알고 있는 상태에서 쓰곤 했는데 그걸 아직 제대로 알지도 모르는 입장에서 서평을 쓰고 있자니 이것도 나름 신기하고 괜찮은 기분이기는 하네.


4.

 이번 소설에서의 배경은 학교다.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읽어본 그녀의 소설에서 학교와 학생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크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러한 학교라는 무대가 추리소설과 가장 쉽게 얽힐만한 부분이 바로 학교 내부의 문제다. 학교에서 사고가 나고 그걸 학교가 덮으려고 한다거나, 학교폭력이 살인으로 이어진다거나. 그리고 이걸 파내기 위한 기자들의 끊임없는 시도, 막아내기 위한 학교 관계자의 분투, 그리고 거기에 선 학생 신분의 주인공이 겪는 당황스러움, 그러나 역시 해결은 그 학생이 한다. 뭐 이 정도의 플롯을 이 소설은 나름 잘 지키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말한 것과는 또 다른 '정통'의 느낌이다.


 학교라는 무대가 소설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굉장히 크다. 학교라는 무대는 장소로서도 그 특수성을 빛내지만, 무엇보다도 학교라는 조직 그 자체가 여타의 조직과는 완전히 다르다. 학교라는 조직은 절대 어울릴 수 없는 사람들까지도 한 데 묶어 함께 생활하는 특수한 공동체이며, 극단적으로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과 또한 극단적으로 나이가 다른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는 조직이다. 우리가 그냥 흘려보냈을 학창 시절, 우리도 이러한 수많은 위기와 난관을 경험해왔다. 이러한 소설들은 그 기억을 들춰낼 뿐이다. 조금 더 극단적으로 각색해낼 뿐이다. 학교라는 조직은 항상 문제점을 안고 있을 수 밖에 없다. 그 구성원이 일관되지도 못하고 나아가서는 굉장히 불안정하며, 그것을 관리하는 입장에 있는 교사 역시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 문제를 얼마나 잘 흘려보내는가, 그 문제를 일으킨 인원들을 얼마나 학교가 잘 소화해내고 좋은 방향으로 인도해낼 수 있는가하는 것이 그 조직의 질을 결정지을 뿐이다.


 학교는 반폐쇄적인 사회다. 학교라는 조직은 군대나 다른 회사, 관청 조직과는 다른 입장에 있다. 서비스를 제공받는 사람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 사이의 갑을 관계가 굉장히 복잡하게 얽혀있다(교사와 학생 사이의 갑을이 교사와 학부모 사이가 되면 갑자기 반전된다거나). 여느 관청 공무원처럼 학교라는 조직도 공무원 특유의 폐쇄성을 엿보이지만, 그 조직원 안에 '민간인' 또는 '서비스의 피제공자'가 포함됨으로써 그 폐쇄성이 여타 조직에 비해 쉽게 흔들린다. 그런 학교는 우리 주변에서 조직 자체로도, 소설의 무대로서도 특수한 환경을 제공할 수 밖에 없다.


5.

 모리우치 선생은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전형적인 교사의 모습을 담고 있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일본 사회의 입시 풍경을 나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와 비슷한 분위기라고 한다면 그런 교사들은 꽤 많을 것이다. 입시 성적을 바탕으로 한 줄세우기식 교육은 아직도 우리 사회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 중 하나다. 그리고 동시에 누구나 해결해야한다고 말하지만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기도 하고. 그것이 과연 해결하지 못한 것인지, 해결하지 않은 것인지 우리는 확답을 내릴 수 없다. 거기에는 교사의 잘못도, 학생의 잘못도, 학부모의 잘못도, 사회나 조직의 문제 자체가 있을 수도 있다. 수능을 중심으로 한 입시판이 우리나라의 중고등학교를 자연스럽게 그런 모양으로 만들어냈다.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교육계의 병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리고 모리우치는 그 모습을 극단적으로 대변한다. 모리우치는 학교라는 조직에 걸맞게 잘 움직이는 학생들, 즉 학교라는 조직에 안전하게 안착한 이들을 최고로 평가하면서 그렇지 못한 인원들을 과감하게 포기한다. 과감이라는 단어가 너무 긍정적이라고 한다면 어울리지는 않지만 '무작정'이라는 표현을 써도 좋을 정도다. 학교라는 조직을 뒤흔드는 아이들까지 내가 데려갈 필요는 없어. 그런 학생은 뿌리째 뽑아내겠다. 모리우치의 발상은 이러한 종류의 것이다.


 그러나 학교라는 조직에 잘 안착한 사람이 정말로 좋고 훌륭한 사람인가 하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 학교라는 조직은 앞서 말한 것처럼 특수성이 굉장히 짙은 조직이다. 대놓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나는 단언할 수 있다. 학교라는 조직, 그리고 그 학교라는 조직의 중심에 있는 '공부'라는 행위에 대해 사람들은 분명한 적성을 가진다. 공부가 적성에 맞고, 학교라는 조직이 적성에 맞는 사람은 분명히 있다. 학교나 공부를 얼마나 좋아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물론 적성에 맞다면 좋아하게 될 확률도 높아지겠지만, 근본적으로 학교라는 조직에서 공부라는 행위를 하며 생활하는 학생이라는 신분, 에 걸맞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해나갈 수 있는 사람. 그 순간 무의미하다고 느껴지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 그것은 어쩌면 학교에 잘 안착했다는 표현보다 잘 '적응해냈다'라고 봐도 무방할지도 모른다.


6.

 모기의 경우를 보자. 이 소설의 한 축에 교육 문제가 있다면 남은 한 축에는 매스컴 문제를 놓고 서술했음이 분명하다. <뉴스어드벤쳐>의 리포터인 모기는 정의를 표방하면서 학교라는 조직을 통째로 뒤흔들어놓는다. 사건의 현장이 되고 있고 그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제3중학교이지만, 작가의 서술은 그런 학교의 편을 들어주고 있어서, 굳이 어느쪽이냐고 한다면 모기가 악의 축처럼 묘사되어진다. 우리는 여기에서 또다른 진부한 문제의 화두를 꺼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알 권리와 그 알 권리를 얻기 위한 과정에서 받는 사람들의 피해는 어느 지점에서 타협되어야할 것인가. 무언가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과 충돌하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새로운 것을 알고 싶은 권리를 얻게 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알리고 싶지 않다는 권리를 침해당할 수 밖에 없는 사회에서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간과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우리는 주변에서 무책임하고 강압적이고 교활한 기자, 라는 이미지를 얼마나 자주 접해왔는가. 작가들은 생리적으로 기자라는 종류의 인간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추리소설에 나오는 경찰이 무능함을 표상하는 것처럼(물론 이 소설은 논외다!) 기자가 그런 역할을 하는 것 뿐인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소설에서 자주 사용되어온 이미지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나라 사회에서 기자의 위치는 점점 그렇나 위치를 향해 달려나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모기는 과연 정말로 정의를 위한 기자인 것일까? 정말로 정의로운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무작정 까발리는 것이 옳을까.


 정의의 구현을 해내는 기자, 알 권리를 위해 뛰면서 좋은 사회를 꿈꾸는 기자, 올바른 기자라는 것은 과연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기자에게는 행위를 할 권리가 없다. 원론적으로는 '현장 불개입의 원칙'이 있고, 실무적으로는 누군가를 돕는 것과 취재가 공존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물론 자신의 안위를 바라보지 않고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은 무수히 많으며 그 과정에서 사회운동가로 변신하는 이들도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분명 첫 줄의 의문, 정의의 구현을 해내는 기자는 분명히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 주변에 그런 기자는 많지가 않다. 당장의 모리만 해도 그렇다. 그가 정말로 무언가의 '정의'를 찾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영달을 바라는 것인지 우리는 확답을 내릴 수 있을까? 


7.

 사회파 추리작가니 뭐니 해서 아무래도 서평을 쓰다보면 자꾸 이런 부분을 지적하게 된다. 이야기 자체로 돌아가자면 나름 매력적이고 나름의 고민이 있고 나름의 모습을 가진 나름의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이 소설의 사실상의 주인공을 뽑으라고 한다면 누구를 뽑아야할까. 이야기의 서술자 역할의 바톤은 정해진 사람들끼리만 주고 받는다. 그러나 적어도 1권까지의 주인공을 뽑으라고 한다면 역시 후지노 료코일 것이다. 중학생이라고 설정했지만 읽다보면 중학생보다는 고등학생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물론 그만큼 조숙하다는 설정을 잘 뒷받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그녀에 비하면 남은 서술자들은 대개 너무 어리거나 전형적이고, 사실은 어디까지나 엑스트라일 뿐입니다, 조금 비중이 있을 뿐이죠, 하고 말하는 것 같은 인물들이다. 서술의 양 축을 후지노 료코와 노다 겐이치가 차지하고 있지만, 노다 겐이치는 자신의 부모님을 죽이려고 시도했던 사건 이후 그 중심에서 굉장히 빠르게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다.


과연 다음 권에서도 료코는 그 자리를 잘 차지하고 이 사건의 반복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 막대한 분량에 지쳤으면서도, 다음권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솔로몬의 위증. 1: 사건

저자
미야베 미유키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3-06-12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화차][모방범]을 잇는 5년 만의 현대 미스터리 구상 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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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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