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과 아날로그

멋있다거나 의미있는 글은 아니고 그냥 끄적임입니다. -_-ㅋ

일본 세일러社의 보급형 모델인 리쿠르트 만년필. 사진 출처 니펜.

이번에, 저번 파커 45 쓰다가 잠시 접었던 만년필을 다시 지르게 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파커45에 불만은 세필이 아니라는 점이었고, 그래서 세필의 명가(?) 중 하나인 세일러 사의 만년필을 사보게 되었습니다. 세필 브랜드 가운데에서는 좀 굵지 않느냐란 소리를 듣는 것 같긴 한데 일본 회사의 만년필은 아직 써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기본적으로 한자 문화권에서는 일본이나 중국 등에서 만드는 얇은 세필 스타일의 만년필이 적합해서(한국어는 한글+한자로 대 혼돈!) 괜찮단 소릴 들었어요. 원래는 하이에이스(구형)만 사려던 계획이었습니다만, 디자인이 혹해서 사버렸습니다. 사고 나서 보니 윤하가 애용하는 만년필이라느니 뭐라느니 말이 많은데 이미 산거 그렇다면 더 좋은거 아니겠습니까(...)

일본 세일러社의 보급형 모델인 하이에이스 만년필. 사진 출처 니펜.

잉크는... 글쎄다입니다. 기본적으로 리쿠르트는 카트리지 전용이지만 주사기 신공으로 잉크를 채워가며 쓸거고, 하이에이스는 컨버터로 쓸 생각이라서 잉크도 꽤나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데, 오로라 같은 회사 잉크는 지나치게 비싼 것 같기도 하고. 잉크의 "표준"이라는 파커의 큉크가 집에 있긴 합니다만(아버지가 사용하셔서요), 한 번 사보는거 진하고 빨리 마른다는 세일러 사의 극흑 잉크를 하나 사봤습니다(극흑 보틀 50ml). 사실 젠틀(Jentle)을 사고 싶었는데 그건 단종품이라고 해서. 레드 브라운 재고가 있긴 했는데, 우선은 검은색을 사자는 생각에 극흑을 샀습니다. 착색이 심하다는데 이건 이거대로 좀 고민이긴 하네요 뭐 -_-;;

그러다 문득 생각하게 된건데, 어떻게 보면 만년필과 펜 사이의 관계는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의 관계와 비슷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아날로그 감성"이 묻어나는, 고전적인 유산일 뿐일지도 모르는 만년필과, 저렴한 가격과 간편함으로 빠르게 보급된 각종 겔펜과 볼펜은 서로 비슷한 존재이면서도 많이 다른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리듐이 자신의 필기습관에 맞게 닳아가며 점점 "자신의 펜"이 되어간다고 하는 만년필. 그 특성상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지만, 누구에게나 맞게 보편화되어 공장에서 찍어져 만들어지고, 잉크가 다 떨어지면 휙- 하고 던져버리는 펜과는 완전히 다른 감성이 살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학생들에게는 이제 만년필이라는 존재가 많이 어색해졌고(저도 학생이지만), 애초에 만년필 자체도 가격이 꽤나 있는 물건이라 쓰는 사람만 쓰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펜이라고 하는 묘하게 인스턴트 적인 존재에 만년필이 점점 묻혀가고 있는 겁니다. 만년필 회사들도 보급형 만년필에는 상당히 무관심하고- 이 쪽에 빠지면 정말 돈 백만원 쓰는건 쉬운 일이라고 평가되는 만큼, 돈도 많이 듭니다. 그나마 우리 나라 학생들의 입장에서 "이 정도면 고민해볼만하지 않을까?" 싶은 수준의 보급형 모델 중 쓸만한 건 세일러 사의 리쿠르트와 하이에이스 모델 정도이고, 일반적으로 서구 브랜드까지 합치면 파커45나 라미 비스타, 그리고 일본회사긴 하지만 세일러 사의 프로피트 영. 보급형이라고 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로트링 사의 아트펜. 그 외에도 보급형이라고 해도 3~8만원대 정도를 보급형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네, 비싸죠. 잉크까지 사야하고.

현대 사회가 중요시하는 실용성과 효율성의 면에서 보자면 속된 말로 만년필은 돈지*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불편한걸 그 비싼돈 주고 사서 쓰는 미* 놈이 어딨냐, 라는 생각을 하실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지만 만년필은 만년필 만의 매력이 아직 살아있는 거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작가나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만년필의 첫 메리트는 깔끔하다-라는 것이죠. 볼펜의 경우 찌꺼기도 상당하고. 그리고 또 다른 메리트는 계속 언급하고 있지만 자신의 필기습관에 최적화된 펜이 자연스레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덕분에 수명의 문제도 있지만, 만년필 만큼은 패인 자국 같은 것들이 "고전", "애착"이라는 뭔가 든든하고 따뜻한 느낌이 묻어나지 않나 싶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면 다 돈 낭비로밖에 보이지 않는 법이죠. 그 분야가 뭔가 전문적인 성향을 띄면 더욱 그렇습니다. 샤프펜슬만해도 수집하는 사람들이 꽤 되지만 거기서 메리트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눈에는 자주 쓰지도 않을 샤프를 왕창 사들이기나 하는 모습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거고, 컴퓨터 부품 사들이는 사람들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컴픁터가 잘 굴러가기만 하면 되지 뭐하러- 거기다가 펜티엄3같은건 왜 사고 앉았어? 라는 반응이 돌아올 겁니다. 만년필도 그런 분야입니다. 샤프펜슬보다 더 깊죠. 처음엔 한 번 써볼까- 하고 담근 발을 빼내지 못하게 되는 분야 중 하나입니다.

만년필이라고 하는게 그렇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물건이죠. 기본적으로 잉크를 주입해놓은 컨버터나 카트리지를 넣어놓거나 닙에 잉크가 잔류해있는 상황에서 6개월 정도 방치해버리면 만년필을 버리게 되고(굳어버리죠), 불편하기도 합니다. 글을 많이 쓰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다지 선호할만한 물건은 아닌 것 같습니다 - 그렇지만 왜일까요, 그런 만년필이 좋은데요. 피상적인 관계, 겔펜과 우리의 관계는 현대 사회의 인간관계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깊지 않죠. 똑같은 것이 이리저리 널려있고, 다 쓰면 버리는 거죠- 애착이랄 것도 없고. 인스턴트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현대 사회의 인간 관계 그 자체가 아닐까요? 반면 만년필은 자신이 항상 써오던 물건이고 든든하죠. 만약 다른 사람의 만년필이라면 왠지 그 사람의 성격이 묻어나는 것 같죠 - 관리상태라거나 닙의 상태를 보면 실제로 그런 면을 아주 조금이나 엿볼 수 있기도 하구요.

만년필도 최근에는 저가형 모델이 조금씩 출시되고 있고, 컨버터 겸용과 함께 카트리지 전용 모델이 상당수 나오고 있고, 일부 회사들에서는 보틀 잉크의 생산량을 줄이고 카트리지를 중심으로 내는 경향도 보입니다. 이는 만년필과 현대식 겔펜/볼펜의 타협점을 찾은 것일까요? 어떤 입장에서보면 타협점이고 또 다른 입장에서 보면 이도 저도 아닌 경우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도저도 아닌 쪽이 좀 더 가깝지 않나 싶네요.

소민(素旼)

공부하고 있습니다. 문의: kimv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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